세상과 사람

피천득

언러브드 2007. 3. 21. 12:29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

 

영원히 늙지 않는 ‘5월의 소년’… 내일의 걱정보다 오늘의 행복함에 감사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선생은 예전에 당신이 쓴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란 글과 똑같이 점잖게, 그러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늙어가고 있다.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가 있구나 하고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나이들수록 자신의 말년에 대한 근심은 더해만 간다. 마땅한 본을 보여줄 늙음의 선배가 귀하기 때문이다….


연세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도 늙음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난 그분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선생의 미수연과 구순잔치에 참석했던 박완서씨의 회고담이다.

그는 이렇게 후배들에게 ‘저렇게 잘 늙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준다.

정작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못느낀다고 했다.

나이 때문에 못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체질상 술, 담배는 평생 하지 않았고 운동도 산책이 전부인데

지금도 동네나 서울대 캠퍼스 등을 산책한다.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읽고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을 듣고

제자 등 친지들을 만나 데이트를 하는 생활은 ‘강의’만 빼고는

교수시절과 별반 다름이 없다.

오월의 신록을 보는 황홀함도 청년시절과 별 차이가 없고

지금도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은 아니지만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쁘고 행복하다.

선생의 오감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내 삶과 똑같은 생을 살고 싶어요.

공부하고 가르치고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글로 남기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늙었다는 생각도 안하고 항상 소년 같은 마음이지만

선생 역시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5년 전 치매에 걸린 부인을 볼 때면 걱정스럽기도 하고

자신 역시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커다란 소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일의 걱정보다 당장 오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평화로운 삶을 유지한다.

당신조차 못 알아보는 치매 부인 때문에 속상해하기보다

도통한 듯 점잖게 치매 증세를 보이는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일에도 감격한다.

 

서울 반포동 32평 아파트는 ‘욕심없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유명한 영문학자이자 작가이면서도 책이 별로 없다.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은 영구 무상임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화첩이나 달력에서 잘라낸 듯한 르누아르의 그림은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두었다.

침대 역시 1인용 간이침대. 동네를 지나가다 누가 버린 것을 가져왔다는 식탁과 의자 역시 짝이 맞지 않는다. 그 흔한 소파도 없고 첨단 가전제품도 하나 없다.

아흔여섯인 당신이 젊은 시절에 헌책방에서 샀으니 족히 100년은 넘었으리라는 낡은 책, 좋아하는 작가와 음악가의 사진들, 가족과 손주들 사진뿐이다. 그나마 쿵쿵 소리로 옆집에 피해를 주기 싫어 못 박아 액자를 걸지 않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이거나 바닥에 세워두었다. 이런 검박한 풍경 속에서 그는 오히려 황제처럼 풍요로워 보인다.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운 것이지만 그의 것이 아니라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 것이거든요. 꼭 좋은 그림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죠.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됩니다. 좋은 기억은 욕심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식사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주로 채식을 하며 소식을 한다.

 ‘아침은 혼자, 점심은 친구와, 저녁은 적과 함께 먹듯 하라’는 서양속담을 지키면 된단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은 거르고 저녁만 푸짐하게 그것도 1차, 2차 술자리까지 이어지니 배도 나오고 건강도 나빠진다고 걱정했다.

 

이상은 1995년 경향신문 인터뷰의 일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