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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종착점

언러브드 2013. 3. 21. 15:32

노화의 종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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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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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

죽음은 누구에게나 시점은 다르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다. 이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인간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같은 곳으로 간다. 장례란 모든 인간이 하나로 되어지는 절차를 말한다. 죽음은 자연스런 것으로 연습할 수 없고 또 피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죽음과 동반한다. 죽음은 삶 속에 항상 있다. 하루를 살아가면 하루만큼 살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든다. 사람은 자기가 느끼는 고뇌와 아픔, 상황에 대한 무력감, 일상에서 당하는 좌절, 노쇠나 질병에 의한 쇠잔함 등으로 죽음과 이미 접촉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대면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높고도 험한 파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고난을 주지만 그것은 반대로 삶의 지혜를 열어주는 좋은 도구역할도 한다. 그것은 망망한 바다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서 삶 속에서 생겨나는 혼미와 판단 착오를 피하도록 도움을 준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인생의 짐을 조금씩 풀어내기 위한 신의 배려이다.

누구나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사랑의 마음으로, 고난을 극복하면서 지혜롭게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노후를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장 강하게 호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잘 죽는 죽음이란 남을 의식하면서 살고 죽음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원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헌신과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좋은 죽음에 해당된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주위의 사람에게 넘겨주는 죽음을 말한다. 또는 다른 사람이 나의 죽음에 힘입어 살게 할 때다. 그는 못다 이룬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미련에 울고 절뚝거리면서 따라가지 않는다.

죽고 나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은 죽음이 자기 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노인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죽음을 긍정한다. 그의 영혼은 죽음을 두려움 없이 대면하는데 이것을 일반 사람들은 `바람직하고 건강한 정신'이라고 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이다. 얼마나 좋은 삶이었는지는 사랑의 실천 정도에 따른다. 생명의 공통된 언어는 사랑이다. 인간은 신과, 심지어는 짐승과도 사랑을 통해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사랑은 삶과 죽음을 관통한다. 살아가면서 사랑이신 신을 만나는 것을, 인간은 제일 크게 갈망한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죽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니까, 죽음은 인간의 제일 큰 갈망을 채워 준다.

헌신적인 기독교에서는 죽음이란 평범하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든든한 결속을 갖게 한다고 한다. 죽음이란 끔찍한 최후나 끝 모를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안에서 새로이 출생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다른 형태로 새로이 연결되는 순간이 된다.

늙음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행복한 여행인 것이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마지못해 체념하면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의 하나로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늙어지는 것은 사랑의 완성으로 가는 헌신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노인들은 죽음을 긍정하는 행위인 `사랑과 용서하기'가 어려워서 죽음 앞에서 떨고 있다. 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도 불안해한다. 죽음의 시점을 예측하기란 삶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사랑의 실천을 위해 어느 한 순간도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죽음을 긍정할 수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