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것(생生)은 죽음의 시작이요. 성盛것은 쇠한 것의 발단이다,
영화스러운 것은 욕되는 것의 조짐이요 .얻는 것은 잃는 것의 원인이다.
그런 때문에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성하면 반드시 쇠衰함이 있고, 영화로우면 반드시 욕됨이 있고,
얻으면 잃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정당한 이치로서, 어리석거나 지혜가 있거나 간에 아무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어두운 사람은 매양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성盛한데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를 그칠 줄 알지 못하고,
영화를 탐내어 피할 줄을 모르고, 얻는 것만 힘쓰고 경계 할 줄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생각하건대 사람이 나면 모두 돌아가게 마련이다. 비록 백년이라도 반드시 돌아갈 날은 오고야 만다.
그러나 오직 글만이 남아 썩지를 않고, 아들이 있어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자첨은 통달한 사람이 아니로다. 죽는다는 것은 즉 돌아가는 것이니,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진실로 아무것도 없게 되면 이 몸도 또한 내 몸이 아닌데, 글이니 아들이니 하고 말할 것이 되지 못한다.
<소자첨蘇子瞻>
죽어서 돌아가 천명天命을 즐길 것을 무엇을 다시 의심하랴,” <도연명>
유총劉聰은 수차국須遮國의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이 부귀富貴를 사랑하기를 사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달이 소미성少微星을 범하자 오吳나라 고사高士들은 죽기를 구해도 죽지 못했다.
또 사람이 명예를 좋아하기를 사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말세末世의 사람들은 이름을 좋아하는 자가 적다.
그러나 부귀에 대해서는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구한다. <동파>
상말에 이르기를“ ”날 때에는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고, 죽을 때에도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통달한 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말한다면, 내 한 몸 이외의 만 가지 일이나 만 가지 물건이 모두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끝을 연구해보면 내 한 몸도 또한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몸을 괴롭게 하여 모든 물건을 여기에 모으게 하고, 죽는데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홀로 무슨 마음일까?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본래 아무 물건도 없는데, 그 어느 곳에 티끌이 있단 말인가? (本來無一物 何處有廛埃)
-이수광의 <지봉유설> 인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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