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쵸(Tenzin Gyatso)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티베트는 본격적으로 외부세계에 노출되기 시작됐다.
이로 인해 서방세계의 언론과 일반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가지는 개인적 상징성을 포함하여 티베트불교와 명상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 점진적으로 퍼지고 있는 티베트 명상센터의 증가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들은(유명 연예인과 민간단체 포함) 왜 티베트 혹은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주관적 이유 중의 하나는 학계나 전문가들이 다분히 국가적, 정치적, 외교적 의도를 가지고
티베트를 평가하거나 접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티베트의 ‘죽음관’과 ‘활불’의 환생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동안 서구 과학은 ‘죽음’에 대해 많은 실험과 이론을 과학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실험하고 그 증거를 통계적으로 보여 왔다.
과학은 심장의 박동이 멎고 뇌파 측정기의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티베트에서는 똑같은 ‘죽음’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상응하는 죽음의 처리방식(상장례)도 다르게 표현된다.
티베트인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영혼’이라는 보이지 않는 비(非)과학적 세계까지 이야기한다.
영혼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영혼의 실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티베트에서 영적 풍요로움을 위해 평생을 정진하는 티베트의 수행승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해왔다.
현재의 삶과 사후의 인간 상태에 관한 티베트 고승들의 견해는 매우 독특하며 체계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죽음과 인간세계로의 재생 사이에 일정한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어떤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생전에 행한 선행과 악행의 누적된 결과물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은 행위, 특히 정신활동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바꾸어서 신이나 동물 같은 존재의 성질을 얻을 수 있다고도 믿는다.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운명이 생전 도덕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가운데,
티베트 라마승들은 ‘바른 방법’을 깨친 사람은 사후의 운명까지도 이상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올바로 수행하고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본인이 원하는 바람직한 상태로 ‘환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밀교에 정통한 고승(대부분 활불)들은 죽을 때, 당신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죽음에 임박해서 나타나는 현상과 감각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육신이 무너질 때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육신이 원래의 요소로 분해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아 존재하고 순환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육신이 무너진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그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티베트에서 ‘죽음’이라는 저편의 세상은 없다. 죽음은 곧 다시 태어남이다.
어떤 존재로 다시 재림하느냐의 차이 뿐이다. 죽음이란 육신의 소멸을 의미할 뿐 정작 중요한 의식(識)은 계속 순환한다.
티베트인들은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른 나라 혹은 타 민족의 죽음과 비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서방의 의학계, 과학계, 심리학자 인지학자 등은 티베트의 수행승이나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신중하게 죽음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티베트만의 환생의식과 정신영역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방세계(우리를 포함하여)는 왜 그토록 죽음과 환생에 대하여 새삼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이는 티베트에 비해 외적환경과 물질문명이 발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
즉 고도의 죽음문화와 웰다잉의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을 살펴볼자.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 선박 건조율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사용률, 인터넷 이용시간 세계 1위,
IMF를 최단 기간에 극복한 나라,
IT산업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핸드폰 보급률 세계 1위,
세계 경제 10번째, 자동차 생산량 세계 5위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2001~2010년 누적 자살자 수 8만 8000명.
2010년에만 자살자수 1만 5566명.
그래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는 나라
(미국 10.5%, 일본 19.7%, 한국 28.1%, OECD 평균 자살률 11.3명보다 148% 높음. 2011년 기준)가 대한민국이다.
티베트보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우리는 왜 자살이 이렇게 높을까?
티베트 활불전세의 이론적 핵심은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의 연속성에 관한 계승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識)은 인간의 육신을 떠나서 타인에게 전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를 티베트에서는 다시 태어남, 즉 ‘환생’이라고 여긴다.
이에 반해 일반인들은 우리 인간의 탄생이 우연이거나 저절로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 자비의 역량을 크게 발휘한 사람들만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이를 ‘환생’의 연속선상으로 받아들인다.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서는 환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죽은 다음에 그는 그가 한 행위들의 미묘한 인상을 마음에 지니고서 다음 세상으로 간다.
그리고 행위들의 수확을 그곳에서 거둔 다음에 그는 이 행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진 자는 환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일찍부터 동양에서는 환생과 카르마(業)의 이론이 비교적 지지를 받았지만, 초기 서양에서는 환생이론은 외면당했다.
서양의 물질주의는 측정하고, 무게를 달고, 듣고, 냄새 맡고, 사거나 팔 수 없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대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전생(前生)을 되살리려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그동안 영적인 영역이었던 환생의 신화는 부활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수집됨에 따라 70년대 중반에는 최면 상태에서 환생의 기억들을 되살림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이상증세를 치료하는 전생 치료법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삶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부각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환생에 대한 관심은 영적인 자각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고도의 과학기술이 판을 치는 서방 세계에서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증대되는 현상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서양이 동양에 삶과 죽음 그리고 영적세계를 묻고 경청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법보신문]
tibet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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