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

삼성 부사장 자살이 남긴 숙제

언러브드 2010. 2. 4. 14:02

[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권하는 이유·②] '관리'의 한계

기사입력 2010-02-04 오후 12:05:06

  • 삼성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지난달 26일, 삼성전자 부사장이 투신자살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 공정 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정통 엔지니어였다.

    한편, 삼성에게 챔피언 자리를 줬던 전자 산업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아이폰 바람을 불러일으킨 애플과 스티브 잡스다. 누구나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와 콘탠츠를 앱스토어에 올릴 수 있다. 이걸 내려 받아 아이폰에 설치한 소비자가 낸 가격 가운데 70%는 개발자 몫이다.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판매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독립 개발자 시대가 열렸다. 아이폰의 성공은 하드웨어 품질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개발자들의 자유로운 열정을 끌어내고,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는 제도가 만든 것이다.

    반면,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의 맞수로 내놓은 옴니아2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지나친 아이폰 열기에 눌린 결과일까. 삼성은 그렇게 보는 듯하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극성스런 네티즌에 의한 반짝 인기"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난달 29일,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책을 냈다.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라는 책에는 그가 삼성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자세히 담겨있다. 삼성 수뇌부에게는 부사장의 자살이나 아이폰 열풍보다 더 큰 악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총수 일가가 아니라 평범한 삼성 직원들의 입장에 서면, <삼성을 생각한다>에 담긴 내용은 삼성이 지금 부딪힌 문제를 푸는 힌트가 될 수 있다.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처럼 시장 자체를 뒤흔드는 창조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문제 말이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삼성 경영에 던지는 시사점을 정리했다. <편집자>

    [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을 권하는 이유·①] "삼성은 왜 '아이폰'을 만들지 못할까?"

    삼성은 유행 안 타는 정장 차림 남성?

    반듯하게 넘긴 가르마 머리, 단정한 옷차림, 서열을 존중하는 깍듯한 예의. 흔히 '삼성맨'이라 불리는 삼성 직원들을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이런 이미지의 배경에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기업 문화가 있다. 삼성에선 오래 전부터 재무와 인사 등 관리부서의 힘이 셌다. 이른바 '삼성맨' 이미지도 관리부서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는 다른 대기업과도 종종 비교되는 대목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대학생 1227명을 상대로 기업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나온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삼성을 보면 주로 보통 체형에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 차림 남성을 떠올린다. 반면, 현대ㆍ기아차에 대해서는 근육질 체형과 사각형 얼굴을 가진 30대 중후반의 생산직 남성이 떠오른다고 응답했다.

    SK는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한 30대 초반의 판매서비스직 남성이었으며 포스코는 근육질 체형의 사각형 얼굴을 가진 40대 초반의 생산직 남성이었다. LG와 롯데는 여성 이미지로 나타났다.

    '보통 체형에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 차림 남성'을 떠올리게하는 기업 문화. 이런 보수적인 문화는 삼성 자동차, e-삼성 등 그룹 차원의 치명적인 경영 실패에도 삼성이 견뎌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너무 엄격한 관리 문화 속에서는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창조적 혁신이 어렵다는 점이 있다. 특히 총수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비서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무시하기 쉬운 재무부서가 주도하는 관리 문화 속에서는 더욱 어렵다.

    '새벽 3시의 커피타임', 극심한 피로감

    다른 문제점은 임직원이 느끼는 피로스트레스다. 너무 심하게 옥죄는 문화를 오랫동안 견뎌내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다. 최근 자살한 삼성전자 부사장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평균적인 '삼성맨'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이미 위험 수위다. <삼성과 소니>라는 연구서를 낸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 교수 역시 '조직 피로감'을 삼성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았다. 혹독한 취업난 속에서 삼성에 입사한 젊은이들이 금세 사표를 내는 경우도, 대부분 극심한 피로감이 원인이다.

    ▲ <과학동아> 1991년 6월호에 실린 삼성 이미지 광고. ⓒ프레시안
    이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1991년 한 잡지 광고를 보면, "새벽 3시의 커피타임 이야기"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사진 참조) 당시 '휴먼테크'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삼성전자의 기업 이미지 광고다. 이 광고에는 "초를 다투는 반도체 기술전쟁…(중략)…진 박사 팀은 여느 때처럼 새벽 3시에 커피 타임을 가졌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새벽 3시 커피 타임'이 일상적인 문화에 대해 어떤 소비자들은 믿음직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직원들에게 눈을 돌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특이체질이 아닌 이상, 이런 고강도 노동을 오래 배겨낼 수는 없다.

    삼성 임원들은 정기적으로 정밀 건강진단을 받는다. 직원들의 심각한 피로감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임직원 건강 '관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삼성 식 해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무노조 경영'이 문제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는 탓에 관리부서의 임직원 쥐어짜기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 그리고 관리부서는 비서실(구조본, 전략기획실 등)이 지휘하는데, 비서실은 합리적인 경영판단보다 총수의 뜻을 앞세우곤 했다. 직원 입장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총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구조에서 임직원 건강 관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조직 피로감'을 해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 열악한 공장 환경

    이 대목에서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무직, 연구개발직 등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달리, 생산직 노동자가 겪는 문제다. 이들이 겪는 것은 그저 피로감,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이다. 맹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반도체 공장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곳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 노동자의 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공장 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다는 게 삼성 측 입장이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이 공개한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된 것은 사실이다. 반도체 부문은 아니지만, 삼성 공장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는 김용철 변호사가 자세히 이야기했다.

    ▲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프레시안
    "OJT를 받으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삼성전자 수원공장가전부문 조립라인을 꼽고 싶다.

    여성 생산직, 남성 생산직이 컨베이어 벨트에 예속돼 두 시간에 10분씩 휴식하면서 꼼짝 없이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혹시 배탈이 나더라도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정도였다. 또 복도는 전등이 희미하여 앞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화장실에는 손 닦는 수건이 없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손수건으로 닦도록 돼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깨끗한 공장 풍경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 직원들이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구나 싶었다.

    북한에서 외부인이 구경하는 평양 거리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는 곳의 환경은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부에는 '지상천국'이라고 홍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했다. 직원들이 기계 부품처럼 묶여 일하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오랫동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본사 직원이나 관리직은 쾌적한 공간에서 대접도 받고 권세도 부리는데, 생산 현장에서는 해마다 생산성 향상 30% 구호 아래 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내핍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텔레비전이 미국으로 적자 수출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3000억 원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관리자 아닌 전문가'는 떠나야 하는 회사, 영원한 '세일즈 머신'"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 문화는 직원 경력 개발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관리부서의 힘이 지나치게 세다보니, 전문성을 쌓는 쪽으로 경력 개발을 하는 임직원이 손해 보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상당수 삼성 직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삼성만 있는 게 아니다. 관리 업무에서 배제된 전문가가 회사에서 버틸 수 없는 구조는 한국 기업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힌다. 외국 선진 기업에는 백발이 성성한 현장 기술자, 연구소에서 평생 한 우물만 판 전문가가 즐비한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 삼성이 '세일즈 머신'에서 벗어나 '기술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다른 형태의 경력 개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최근 자살한 삼성 부사장을 놓고서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그 부사장은 평생 연구개발 업무만 해 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장장으로 발령이 났다. 어떤 이들에겐 이게 만족스런 인사조치일 수 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영임원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경영이나 관리 업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 업무의 정점에 있던 삼성 부사장의 자살은, 삼성 조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조직 구성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삼성과 인텔> 저자인 신용인 박사(전 삼성전자 전무)는 '이중 출세 방식(dual ladder career)'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리자로 성공하는 경로와 전문가로 성공하는 경로를 동등하게 대접하는 방식이다. 일정 직급 이상 승진하면, 반드시 관리 업무를 맡아야 하는 구조를 깨자는 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텔에서는 '비서 한 명만 두고 일하는 기술 임원'을 부러워하는 문화가 있었다. 굳이 관리자가 되지 않더라도,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라는 이야기다. 이런 문화가 있으면, 관리자가 지나친 권력을 누리는 일이 줄어든다. 그래야 전문적인 식견과 통찰력 있는 의견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비자금 털어내야, 삼성 문화 바뀐다"

    '굳이 관리자가 되지 않더라도, 인정받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일까. 김용철 변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삼성에서 관리조직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게다. 바로 '비리'다.

    ⓒ프레시안
    "구조본에 있는 비자금 담당자는 계열사에 일정 금액씩 비자금을 할당했다. 경영이 어려운 회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과거 삼성엔지니어링은 부실 규모가 1조 원에 달하고 수주 실적도 없어서 심한 적자에 시달렸다. 당시 이 회사 관리담당(경영지원실장)이었던 김능수가 '회사가 너무 어렵다'며 내놓을 돈이 없다고 버텼지만, 구조본은 그에게 위협하다시피해서 매년 50억 원을 받아냈다.

    구조본 재무팀 관재부서에 있는 30대 초, 중반 과장들은 프랑스제 델시 청회색 초대형 여행용 가방에 들어 있는 현금을 수시로 본관 지하주차장에서 27층 비밀금고로 날랐다.

    물론, 다른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운반하지만 구조본 직원들은 대개 운반 장면을 보게 된다. 대부분 애써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한다. 현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하기 힘들 때는, 화물운반트롤리(trolley)를 사용하기도 했다. 비자금을 운반하는 관재파트 과장들은 주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는데, 미래의 사장감으로 분류됐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비자금을 만드는 구조에서 임직원 관리를 느슨하게 했다간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 없다. "로비 기술자, 비자금 기술자가 반도체 기술자보다 위에 있는 구조" 역시 필연적이다.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면서 '무노조 경영'을 고집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노동조합이라면, 자신들에게 돌아오거나 회사에 재투자돼야 할 부(富)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할 리 없다.

    비자금이 사라지고 투명한 경영구조가 갖춰지지 않는 한, 감시와 통제 위주의 삼성 문화는 바뀔 수 없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