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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역대왕 일대기

언러브드 2013. 12. 8. 09:55
별그림자 님의 답변 | 2008-06-23 12:28

태조~선조> (1392~ 1608)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선조
태조(太祖)
(1392~1398)
정치 -태조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1392)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함(1392)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함(1393)
-한양으로 도읍 천도(1394)
사회/경제 -의료기관 활인서 (活人署), 혜민서 (惠民署) 설치(1392)
-전제(田制)개혁(1395)
-예문 춘추관 설치(1395)
-제복(祭服) 제정(1395)
-종묘사직단·경복궁 창건 (1395)
-염분, 어량의 수세 결정(1397)
-제생원(濟生院) 설치(1397)
-가례도감(嘉禮都監) 설치(1397)
-숭례문 창건(1398)
문화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편찬(1394)
-고려사 편찬(1395)
-천상열차 분야지도각석제작(1395, 국보 제228호)
-경제육전(經濟六典) 간행(1397)
정종(正宗)
(1398∼1400)
정치 -개경으로 환도 (1399)
-사병폐지(1400)
-관제개혁(1400) : 승정원·승령부 설치
사회/경제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1399)
문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편찬(1399)
태종(太宗)
(1400∼1418)
정치 -관제개혁(1401) :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
-한양으로 재천도(1405)
-11도에 도절제사(都節制使)를 둠(1409)
-조선8도의 지방행정조직 완성(1413)
-조관관복제(朝官官服制) 정비(1416)
사회/경제 -사섬서(司贍署)설치(1401) : 저화(楮貨) 관장서
-신문고 설치(1401)
-공신전-사사전(寺社田)의 수세법 제정(1402)
-창덕궁 창건(1405)
-조운법(漕運法) 시행(1412)
-동-서양계의 양전실시(1413) : 평안-함경지방의 토지측량
-호패법 제정(1413) : 16세 이상 남자의 신분증명서
-도첩제(度牒制)실시(1416)
문화 -주자소(鑄字所)설치(1403) : 계미자 만듬
-태조실록편찬(1413)
-조지소(造紙所)설치(1415)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간행(1417)
-경원부(慶源府) 설치(1401)
-십학(十學) 설치(1406)
-벽골제 수축(1415
 
세종(世宗)
(1418∼1450)
정치 -대마도정벌(1419)
-집현전설치 (1420)
-삼포개항(1426):부산포(동래), 제포(웅천), 염포(울산)
-사군(四郡)설치(1432∼1443)
-육진(六鎭)설치(1437∼1440
사회/경제 -창덕궁인정전 준공 (1418)
-성문도감(城門都監)설치(1422)
-각도에 진제소(賑濟所)설치(1422)
-불교를 선-교양종, 36사(寺)로 통합(1424)
-조선통보주조(1424)
-수차(水車)의 제작(1429)
-농사직설(農事直說)편찬(1430)
토질에 따라 6등급, 작황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
-공법(貢法)의 제정(1444) :토질에 따라 6등급,
작황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
문화 -경자자(庚子字) 만듬(1420)
-팔도지리지(1432)
-삼강행실 편찬(1432)
-혼천의 새로 만듬(1433)
- 갑인자 만듬(1434)
-자격루(물시계) 경복궁에 설치(1434)
-훈민정음 창제(1443)-반포(1446)
-용비어천가 지음(1445)-간행(1447)
-안견, 몽유도원도 그림(1447)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간행(1449)
문종(文宗)
(1450∼1452)
정치 화차(火車) 제작(1451)
사회/경제 -세종의 영릉 조성(1450)
-각도에 도회(都會)를 정함(1450)
-숭례문 중수(1451)
-진관사(津寬寺)-수륙사(水陸寺)창건(1451)
문화 -양계(兩界)지도제작(1451)
-고려사(高麗史)완성(145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편찬(1452)
-세종실록편찬시작(1452)
단종(端宗)
(1452∼1455)
정치 -세종대왕 실록 163권 완성(1454)
사회/경제 -철화분청제작(1454)
-문-무관의 상복흉배(常服胸背)정함(1454)
문화 -악보(樂譜)간행(1453)
-고려사 간행-배포(1454)
 
세조(世祖)
(1455∼1468)
정치 -군제개혁(1457):3군을 5위로 편성
-홍문관 설치(1463)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개편(1464):호 단위에서 인정 단위로 개편
사회/경제 -원각사 준공(1464∼1465)
-팔방통보 주조(1464)
-직전법(職田法)실시(1466)
문화 -간경도감설치(1461∼1471)
-월인석보 완성(1459)
-동국지도 작성(1463)
-경상도지리지 편찬(1465)
-홍문관설치(1463)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만듬(1467)
예종(睿宗)
(1468∼1469)
정치 민수사옥(閔粹史獄)일어남(1469)
사회/경제 -둔전의 민간 경작 허가(1469)
-삼포의 사무역 금지(1469)
-군적개정-호패법폐지(1469)
문화 -경국대전(經國大典) 완성(1469)
-무정보감(武定寶鑑)완성(1469)
-봉선사(奉先寺) 범종 완성(1469)
성종(成宗)
(1469∼1494)
정치 -여진 정벌(1479)
-우림위(羽林衛) 설치(1492):궁중호위기관
사회/경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실시(1470)
-과거의 식년제(式年制) 개정(1472)
-창경궁 준공(1484)
-삼포의 사무역 허가(1492)
문화 -수차제작(1488)
-경국대전(經國大典) 및 속록(續綠) 반포(1474)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완성(1474)
-동문선(東文選) 편찬(1478) : 한문학 정리서
-동국여지승람 편찬(1481)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1474) : 최초의 우리나라 통사
-악학궤범 완성(1474)
연산군(燕山君)
(1494∼1506)
정치 -종묘제도 제정(1495)
-무오사화(戊午士禍)일어남(1498)
-갑자사화(甲子士禍)일어남(1504)
사회/경제 -상평창(常平倉)설치(1498):물가조절기관
-호적식년(戶籍式年)개정(1498)
-비융사(備戎司)설치(1500):갑옷제조처
문화 종묘조천의 편찬(1495)
 
중종(中宗)
(1506∼1544)
정치 -삼포왜란(1510):삼포폐항
-임시조약(1512):세견선-세견미 줄임
-기묘사화(己卯士禍)일어남(1519)
-신사무옥(辛巳誣獄)일어남(1521)
사회/경제 -진휼청(賑恤廳)설치(1511):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던 관청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실시(1541):포를 징수하여 군인을
고용하는 용병제 실시
-승과(僧科)폐지(1507)
-여씨향약 8도에 시행(1517)
-백운동서원 세움(1543):사액서원의 시초
문화 -삼강행실(三綱行實) 반포(1511)
-주자도감(鑄字都監)설치, 병자자(丙子字)주조(1516)
-훈몽자회(訓蒙字會)지음(1527):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신증 동국여지승람 완성(1531)
인종(仁宗)
(1545∼1545)
정치 을사사화(乙巳士禍)일어남(1545)
사회/경제  
문화 이언적 소학언해 간행(1545)
명종(明宗)
(1545∼1567)
정치 -정미조약(丁未條約)(1547):대마도와 수호조약을 개정
-비변사(備邊司)설치(1554)
-을묘왜변(乙卯倭變)일어남(1555)
사회/경제 -도량형 통일(1548)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하사(1550)
-선과(禪科)설치(1552
문화 -명에서 양명학(陽明學) 들여옴 (1550)
-종경교정청(鐘磬校正廳)설치(1552) :
아악기인 종과 경을 교정한 기관
-구황촬요(救荒撮要)편찬(1554)
-대전원전(大典元典), 대전속전(大典續典), 대전속집(大典續集)
간행 (1558)
선조(宣祖)
(1567∼1608)
정치 -임진왜란 일어남(1592)
-진주대첩(1592)
-한산대첩(1592)
-행주대첩(1593)
-훈련도감(訓練都監) 설치(1594
사회/경제 -도산서원 건립(1574)
-중강개시(中江開市):임진왜란 중 식량확보를 위해 교역(1593)
문화 -금보(琴譜) 간행 : 현재 전하는 유일한 고전악보
-비격진천뢰 발명(1592)
-역조실록(歷朝實錄) 중인(1606)
-교서관(校書館)-향약(鄕約) 간행(1573)
 
<광해군~순종> (1608 ~ 1910)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현종/ 철종/ 고종/ 순종
광해군(光海君)
(1608~1623)
정치 기유조약(己酉條約):부산포만 개항
사회/경제 -대동법(경기도)실시
-창덕궁 중건 (1609)
-경덕궁(경희궁)-자수궁-인경궁 창건 (1616)
문화 -양금신보(梁琴新譜) 간행(1610)
-허준(許浚)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 간행 (1613)
-이수광(李嗽光) 지봉유설(芝峰類說) 지음 (1614)
인조(仁祖)
(1623∼1649)
정치 -인조반정(1623)
-총융청 설치(1624)
-남한산성 수축,수어청 설치(1626)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사회/경제 -상평통보 주전(1633)
-북관개시(開市)무역시작 : 회령개시(1638)
-천리경-자명종-화포 수입(1631)
-염초(焰硝)제조(1633)
-지질포(地質砲)제조(1625)
문화 -금산사 중건(1626)
-개암사(開巖寺)중건(1636)
-마니산사고(史庫)설치(1628)
효종(孝宗)
(1649∼1659)
정치 나선정벌 : 1차(1654), 2차(1658)
사회/경제 -십전통보주전(1651)
-설점수세법 제정(1651) : 민간자본이 광산개발에 참여
-하멜 일행 제주도 표착(1653)
문화 -농가집성(農家集成) 간행(1655)
-악학궤범(樂學軌範) 재간행(1655)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간행(1659)
-시헌력(時憲曆) 채택(1653)
현종(顯宗)
(1659∼1674)
정치 -금군삼청(禁軍三廳)설치(1666):왕실의 수위-신변보호를 위하여 만든 군대
-윤선도 삼영(三永)유배(1660)
사회/경제 -제언사 설치(1662) : 각도의 수리시설. 제방을 조사·
수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기관
-유기아(遺棄兒)의 수양법(收養法)세움(1671)
문화 -실록자(實錄字)제조(1668)
-이현보, 농압집(聾巖集)간행(1668)
-동경통지(東京通志)편찬-간행(1669)
-권근, 양촌집(陽村集)간행(1674)
숙종(肅宗)
(1674∼1720)
정치 -북한산성 수축(1711)
-백두산정계비 세움(1712):청국과의 국경을 정한 비
-금위영(禁衛營) 설치(1683)
-일본에 통신사(通信使) 파견(1711)
사회/경제 -상평통보 발행(1678)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전국실시(1675)
-전국적으로 대동법 시행 (1708)
-동두곡(銅斗斛) 주조, 8도에 보냄(1715)
-호구조사 실시(1717)
문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 설치(1682)
-북관지(北關志) 간행(1693)
-강화성 개축(1697)
-선원보략(璿源譜略) 완성(1700)
-불랑기 제조(1708)
-선원계보(璿源系譜)기략증보(記略增補)완성(1719)
 
경종(景宗)
(1720∼1724)
정치  
사회/경제 -노비의 속오군편성 폐지(1721)
문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 문신종(問辰鍾)제조(1723)
-남구만 약천집(樂泉集) 간행(1723)
영조(英祖)
(1724∼1776)
정치 -탕평책(蕩平策) 실시(1725)
-탕평비(蕩平碑) 세움(1742)
사회/경제 -삼조(三條)의 계서(戒書)반포(1726):붕당, 사치, 숭음(崇飮) 금지
-균역청(均役廳)설치(1750) : 균역법 시행
-국혼정례(國婚定例) 제정(1749)
-가체(加?) 금지, 족두리 사용(1756)
-고구마 전래(1763)
-전국 제언 수축(1770∼1) : 수리시설 수리
-경모궁 재건(1776):창덕궁에 사도세자 사당 세움
문화 속오례의-속대전 완성(1744)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齊色圖) 그림(1751)
-반계수록 간행(1761)
-해동가요 편찬(1763):김수장이 엮은 시조집
-동국문헌비고 완성(1770)
정조(正祖)
(1776∼1800)
정치 -신해박해 일어남(1791):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
-수원부성 이룩됨(1796)
사회/경제 -제언절목(堤堰節目) 반포(1778):수리시설 개발
-신해통공(辛亥通共) 공포(1791):시전(市廛)의 특전을 폐지, 자유 매매 허가
-천주교 금지(1786)
문화 -규장각(奎章閣) 설립(1776)
-북학의(北學議) 간행(1778)
-천세력(千歲曆) 편찬(1782)
-대전통편(大典通編) 완성(1785):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그 이후에 임금이 내린 교명과 현행법을 한데 모아 만든 책
-동사강목(東史綱目)간행(1790)
-정약용, 거중기 발명(1792):수원부성(華城)건축에 사용함
순조(純祖)
(1800∼1834)
정치 -신유박해 일어남(1801)
-홍경래의 난 일어남(1811)
-영국상선 암허스트호 통상요구(1832)
사회/경제 -관노비 해방(1801)
-김정희 진흥왕순수비 발견, 68자 해독(1817)
-감자전래(1824)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1831)
문화 -선원보략(璿源補略) 중수 완료(1801)
-만기요람 완성(1809):조선후기의 재정군제를 설명한 책
-자산어보(玆山魚譜)완성(1815)
-서운관지(書雲觀志)완성(1818)
-목민심서(牧民心書) 완성(1818)
-전의감, 의학과강책(醫學科講冊) 개정(1831)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1831)
헌종(憲宗)
(1834∼1849)
정치 -기해박해 일어남(1839)
-이양선(異樣船) 출현(1848):경상-전라-황해-강원
사회/경제 -척사윤음(斥邪綸音) 반포(1839)
-김대건, 최초의 신부가 됨(1845)
-사삼 밀매금지법 제정(1847)
문화 -임원16지(林園十六志) 완성(1835)
-낙선재 준공(1847)
-삼조보감(三朝寶鑑) 완성(1848)
 
철종(哲宗)
(1849∼1863)
정치 -러시아 함대 원산에 와서 통상요구(1861)
-진주민란 일어남(1862)
사회/경제 -최제우, 동학 창시(1860)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설치(1862)
문화 -농가월령가 완성(1849)
-헌종어제(憲宗御製)-열성어제(列聖御製) 간행(1850)
-통문관지속편(通文館志續篇)완성(1856)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1861)
고종(高宗)
(1863∼1907)
정치 -신미양요(1871):척화비세움
-병자수호조약(1876)
-임오군란(1882)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1883)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전쟁 일어남(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시작됨(1894)
-명성황후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弑害)(1895)
-독립협회 결성(1896)
-아관파천(1896)
-대한제국 수립(1897)
-을사조약 체결(1905)
-헤이그특사 파견(1907):이상설-이준-이위종
사회/경제 -혜상공국(惠商公局) 설치(1883)
-사환조례(社還條例) 반포(1895):환곡을 사환으로 개칭
-화페 조례 공포:금본위제도(1901)
-부산-원산-인천항 개항
-도량형(度量衡) 개정-통일(1902)
-당백전 발행(1866)
-광혜원 설립(1885)
-방곡령 선포(1889):미곡의 대일수출 금지
-독립문 세움(1896)
-경인선 완공(1899)
-경부선 철도 부설 착공(1904)
-국채보상운동 일어남(1907)
문화 -경복궁 중건(1865∼1868)
-서원철폐(1871):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철폐
-지석영, 종두법 실시(1879)
-한성순보 발간(1883)
-서유견문(西遊見聞) 간행(1895)
-독립신문 창간(1896)
-수뢰포(水雷砲) 제작(1867)
-배재학당 설립(1885)
순종(純宗)
(1907∼1910)
정치 -정미7조약조인(1907)
-신민회조직 (1907)
-한일합방조약조인 (1910)
사회/경제 -경부선 철도부설 착공(1904)
-동양척식주식회사세움(1908)
-한국은행 설립(1909)
-창경원 동·식물원 개설(1909)
-덕수궁 석조전 준공 (1909)
-관측소 설치 (1908)
문화 -증보문헌비고 완성(1908)
-최초의 신극 은세계공연 (1908)
-국조보검 90권 완성(1908)

출처 : 네이버 ㅋㅋ퍼 오니라 무지 힘듬~ㅠㅠ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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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비전 님의 답변 | 2008-06-23 14:18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다
 
1.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1) 러·일 전쟁의 시작과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 의정서가 체결
     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증한
     다고 되어 있으나 모두가 주권 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2) 러·일 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
     시아 회사에 주었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무 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곤스케공사 사이에 ‘외국인 용병 협정’
     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 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3) 포츠머스 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
     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하야시
     공사와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우고 조약의 체결을 강행하려 하였
     다.
(4) 일본은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는 이른
     바 을사조약(1905)을 맺었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
     제의 칙재(임금의 재결)를 강요한 뒤 같은 날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
     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5)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원래 있었던 공사관의 모든 업무를 통감부로 옮기고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 보호의 대권, 관리의 감독권, 그리고 군대 동원
     권도 가지게 되었다
(6) 통감부는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
     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조선의 최고 감독 기관으로 강력한 세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지배
     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에 대한 우리의 항거
 
1.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 투쟁  
(1)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시일야 방성대곡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
     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일본에 저항하는
     정신을 드높였다.
(2) 상소 : 이상설을 비롯하여 민영환, 최익현 등이 조약 파기와 매국노 처단을 요구하며 강
     경하게 상소하였다.
(3) 순국 : 민영환 등은 상소로도 조약 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
     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한응 등
     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4) 민중 활동 : 전국적인 의병 항쟁이 일어났고 조약에 대한 항의 표시로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으며, 학생들의 자진 휴학이 이어졌다. 또한 나철에 의한 5적 암살단이 조직되
     기도 하였다.
(5)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부당성
     을 주장하고  만국 기자 협회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준 열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제는 고종 황
     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였다.
(6) 일제는 재정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고 울분을 참지 못한 대대장 박
     승환의 자결이 이어졌다. 이때 해산된 군대는 의병에 합류하였다.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 전쟁
 
1. 의병 전쟁
(1) 의병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
     발적으로 일어나 외적에 대항해 싸운 민간 병사들을 말한다. 조선말에 일어난 의병 활동
     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의병은 무기나 전투 능력면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힘이 부족
     했지만 자기 고장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2) 을미사변 때에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항거와 단발령의 실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의병으로 유인석, 이강년 등이 주축이 되었다.
(3) 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의병 활동이 보다 활발해졌으며 민종식, 최익현, 이
     은찬, 이재구 등이 주축이 되어 각지에서 애국 운동을 고취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
     에 대항하여 산발적인 전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
     해 실패하고 말았다.
(4)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 해산 후에는 군인들 중의 일부가 가담하였다. 군인들의
     가담으로 인해 의병은 전투력이 강화되어 일본군과 큰 싸움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1908년 1월에는 전국 의병 부대가 연합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 작전을 펴 흥인지
     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5)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 의병들은 활동 장소를 간도나
     연해주, 중국 동북부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중국의 봉오동과 청산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쟁도 독립군의 활약이다.
(6) 의병들은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여기저기서 큰 전과를 올리면서도 주민들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도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
 
1. 학교의 민족 운동  
(1)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교육, 언론, 학문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대해 우리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는데 안창호와 이승훈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은 비밀 독립 운동 단체에 참
     가하여 활동하면서 신식 학교를 세우거나 강연회를 열고 책을 발행하여 교육을 통해 국
     민들을 계몽하였다.
(2) 신민회 조직 : 1907년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로 을사조약이 맺어진 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갑,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이 조직한 비밀 단체이다. 신민회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각 방면에 걸쳐 진흥 운동을 전개하여 국가의 실력을 발휘하고
     자 하였으며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대한 매일 신보’를 발행하
     였다.
 
2. 국채 보상 운동  
  일제 통감부가 한국 침략에 필요한 시설 및 부대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의 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빌려쓰게 했는데, 그 액수가 1907년에는 1천 3백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정부는 적자 재정이었으므로 외채를 갚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
  였다. 이에 외채를 갚지 못할 경우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위기 의식으로 온 국민이
  외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특히 황성 신문, 대한 매
  일 신보, 제국 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온 국민의
  참여를 유도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 역사 연구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이어가고 자주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은 조선사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우리 역
  사를 바로 알게 하는 데 힘썼다. 또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역사책을 발행하여 일부 역
  사가들의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좇아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려는 사대
  주의적 생각을 철저히 비판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해서 활동한 인물들을 발굴
  해 내어 높이 재평가함으로써 민족 주체 사관을 확고히 정립하였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원문출처 : [카페] "푸른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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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Re지룡oll 님의 답변 | 2008-07-16 18:24

- 숙종(1674년 ~ 1720년)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가 숙종때이다.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숙종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기도 했다. 선조시대부터 시작된 신하들의 당파싸움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당파싸움에서 승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왕들이 자신을 지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이를 이용해서 한 당파가 세가 너무 커졌다 싶으면 그 당파를 싹 몰아내고, 다른 당파로 조정을 채웠다. 숙종의 이러한 행동은 왕권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당파들의 대립을 더욱 부채질한 측면도 있었다.

 

1680년 숙종은 남인을 내쫓고 서인을 불러들였는데, 이 때 서인이 남인을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노론과 그에 반대하는 소론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로써 조정에는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이렇게 네 개의 당파가 존재하게 되었다.

 

※ 당파싸움의 원인과 발생

 

당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 경종(1720년 ~ 1724년)

 

 

- 영조(1724년 ~ 1776년)

 

탕평책이란 신하들을 공평하게 대하여 당파 싸움을 없애고자 하는 정책이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당파 싸움을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나, 또한 슬픔도 맛봐야 했다. 영조가 왕이 된지 25년이 흘렀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세자가 영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자 남인과 소론 등이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고 했다. 이에 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영조는 젊은 왕비(정순왕후)를 새로 들였다. 노론들은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순왕후에게 접근하였다. 이에 정순왕후도 노론과 함께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여 자꾸 꾸짖었고, 세자는 마음이 상해 함부로 행동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궁녀를 죽이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영조는 다시 나라 일을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1761년 세자가 영조 모르게 관서지방(평안도 지방)을 다녀왔다. 그러자 노론들은 관서지방에 다녀온 것은 사람을 모아 주상전하를 밀어 낼 음모를 꾸미기 위함이라고 세자를 모함하게 시작했다. 세자로 인해 다시 당파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영조는 결국 세자를 뒤주에 꼬박 8일을 가둬 숨을 거두게 하고 말았다. 이는 영조가 당파싸움을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모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도 영조는 당파싸움을 뿌리뽑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우선 서원을 새로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과거시험에 탕평과를 만들어 당파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선발하려고 하였으며, 같은 당파에 속한 양반들의 자제끼리는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에는 군대를 나가야 하는 남자가 베를 두 필 내면 나가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었는데, 베를 두 필에서 한 필로 낮추는 균역법을 만들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다. 또한 청계천 공사를 벌려 공사에 나오는 백성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통 궁중 음식 가운데 '탕평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음식을 만든 사람이 바로 영조라고 한다. 가지각색의 재료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맛을 내는 것을 신하들에게 보여 준 다음, 이 음식 재료처럼 어우러져 정치를 한다면 나라가 더욱 발전할 것임을 신하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탕평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조가 당파 싸움을 누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또 한번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 정조(1776년 ~ 1800년)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세종대왕대처럼 나라를 이끌어갈 젊고 깨끗한 인재를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부터 4년 뒤 정조는 규장각의 힘을 크게 확대하였다. 규장각에서 승정원, 홍문관, 춘추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으로 비서실 역할을 하는 곳이며, 홍문관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이며, 춘추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인재를 발굴하려고 했던 정조는 서얼(첩이 낳은 자식) 출신도 과감하게 등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노비를 없앨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정조의 이 같은 의지 덕에 박제가와 이덕무 같은 능력있는 학자들이 규장각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노론, 소론 등의 당파가 없어지고, 정조의 뜻을 따르는 시파와 그에 반대하는 벽파로만 신하들이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조의 노력으로 새로운 학문인 실학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백성들사이에는 서민문학이 유행하였다.

 

※ 실학

 

실학은 실사구시(사실에 토대를 주어 진리를 탐구한다.), 이용후생(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등을 편리하게 하여 의식을 풍부하게 하고 생계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 경세치용(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정신의 학문이다. 실학은 18세기부터 크게 발전했는데, 실학자들의 관심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박지원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상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하일기], [양반전]같은 소설에서도 그의 이런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서얼 출신인 박제가는 적극적인 무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에서 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상업에 관심을 가졌다면, 정약용은 농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전제'를 주장했는데, '여전제'란 공동 농장을 만들어 함께 농사 짓고, 함께 분배하자는 제도를 말한다.

 

또한 [목민심서]에서는 관리들의 자세와 제도의 그릇된 점을 비판했다. 이러한 실학자들은 정조의 신뢰를 받았지만 이들의 주장이 나라 일에 크게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이들이 대부분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가문출신이었거나, 서얼출신이었던 탓이었다. 또한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큰 원인이었다. 이렇게 양반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이 유행했다면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민 문학이 크게 유행했다.

 

※ 서민문학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의 소설들은 거의 18세기에 쓰인 한글 소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은 황무지가 되다시피 한 땅을 다시 일구어 냈다. 그리고 더 많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이앙법과 이모작이라는 농사법도 개발했다. 이앙법이란 볍씨를 모판에 심은 뒤 싹이 난 모를 다시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을 말한다. 이모작이란 가을에 벼를 거두어들인 논에 보리를 심어 이듬해 봄에 거두어 들이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 가운데 부자가 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부자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양반의 신분을 사려고 했다. 때문에 돈을 써서 족보를 위조하거나, 다른 지방으로 도망쳐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숙종때까지만 해도 양반은 전체 인구의 9%였으나, 영조때 19%, 정조때는 37%, 철종에 이르러서는 70%에 다다랐다. 이로 인해 양반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백성들은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문에 기생의 딸과 양반의 아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춘향전]과 같은 소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바람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백성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또한 18세기에는 서민들만이 즐기는 문화인 판소리, 탈춤, 민화 등이 크게 발달했다.

 

 

- 순조(1800년 ~ 1834년)

 

1784년, 이승훈은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은 직후 조선으로 돌아와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한양에 도착한 이승훈은 곧 이벽을 찾아갔다. 이들은 이듬해부터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곧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이때 다른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심한 고문을 받아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범우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곧이 바로 김범우의 집이었다고 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이처럼 정조 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박해는 1800년 정조가 죽은 뒤부터였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고 한다. 이때 소개된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새로운 학문으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부터 천주교는 본격저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천주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에게 벌을 내렸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등극하면서 천주교 박해는 또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순조는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열한 살이라, 영조의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정조를 따랐던 시파를 몹시 싫어했다. 그런데 시파를 가운데 서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천주교의 박해는 나라의 전통을 지키는 것임과 동시에 시파를 몰아낼 수 있는 좋은 구실이라고 생각했다. 정순왕후는 1801년에만 천주교 신자 300여 명을 죽였다. 이 때 이승훈 등을 비롯한 정약용의 형제들, 청에서 온 신부 주문모 등도 죽였다. 그리고 정약용과 박제가 등이 이와 연류되어 유배되었다.

 

세월이 흘러 순조가 열다섯 살이 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그 이듬해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순조는 장인인 김조순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김조순은 자신의 친척인 안동김씨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안동김씨의 판이 되었다. 천주교의 박해는 정약용과 같은 인재들을 조정에서 쫓아내는데 이용되었고, 그것은 안동김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 헌종(1834년 ~ 1849년)

 

 

- 철종(1849년 ~ 1863년)

 

이 시기에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다.

 

 

- 고종(1863년 ~ 1907년)

 

고종은 1852년(철종3년)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 2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나라일을 대신 맡아 돌보았다. 1866년 고종은 민치록의 딸(명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고종은 직접 정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갖지 못해 주로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파의 자문을 얻어 나라일을 돌보았다.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했고, 1881년 일본과 청나라에 각각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보내어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워오도록 하였다. 또 같은 통리기무아문을 만들어 조정을 근대적으로 바꾸고, 일본 군사 교관을 초빙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었다. 1882년 기존의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여 임오군란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 드러자 민씨 일파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개입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였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끌고갔다. 1884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고종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혁명의 진압을 빌미로 일어난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급기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그런데 러시아 영사관이 고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보호해 준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고종의 보호를 대가로 조선의 여러 가지 이권을 넘겨달락 요구했다. 즉 광산을 개발하거나 철도를 놓을 권리 등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많은 이권이 서양에게 넘어갔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라는 연호를 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모두 조선이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리여는 고종의 노력이었다. 아관파천 이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러시아였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의 여순 항을 기습 공격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고종에게 '한일의정서'를 내밀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우리 땅에서 맘대로 군사 행동흘 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의 요구를 모조건 받아들이라는 조약이었다.

 

고종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으나, 얼마 못가 이 한일의정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무찌른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은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내밀었다.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들의 협박과 강압에 못 이겨 을사조약을 맺었고, 그 결과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고종은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밀사들은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고종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로 폐위되고 아들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고종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강화도 조약

 

1884년(고종21년)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명성황후 일파와 청나라를 배격하고, 자주 근대화정책을 펴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 12월 4일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급진파는 이 때 폭발물을 터뜨리고, 고종에게 청나라가 쳐들어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데리고 피신한 뒤, 온건파 대신들을 죽였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급진파는 다음 날 청나라와 관계를 끓고, 양반 제도를 폐지한다는 등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협조를 약속했던 일본의 배반과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흘 만에 실패했다.

 

※ 동학혁명

 

1894년(고종31년)에 동학 교도가 중심이 되어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혁명이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이 원인이 되어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동학군은 벼슬아치의 부정부채 금비와, 일본과 서양 등 외세의 침략의 반대를 내세우며,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청군과 일본이 개입하려 하자, 정부가 제시한 12개항의 휴전 조건을 수락하고 해산했다. 그 뒤 정부에서 휴전 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일본군이 들어오자 전국적인 규모로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식 군대에게 크게 패했다. 동학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갑오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 갑오개혁

 

1894년(고종31년,갑오년)에서 1895년까지 고종이 추진한 개혁으로 '갑오경장'이라고 부른다. 이 때 조선은 과거제도 폐지, 도량형 통일, 과부의 재혼 허용 등 정치, 경제, 사회분야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바꾸었다.

 

※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자객들이 경복궁에 기습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자, 조선에서 일본의 위치가 불리해졌다. 그러자 일본은 자국의 세력을 넗히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게기로 전국적으로 일본을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나고,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 만국평화회의

 

1899년과 1907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건의로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두 차례 열렸던 국제 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각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문제를 의논하였다. 우리 나라는 1907년 제 2차 회의에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 순종(1907년 ~ 1910년)

 

이 시기에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기고 군대를 해산하게 된다. 1910년엔 한일합방이 일어나 일본의 무단통치 또는 헌병경찰이 조선을 통치하게 된다. 토지조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농토를 빼앗는다. 1919년엔 3.1운동이 발생하고 이후 문화통치로 바뀌게 된다.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의 항쟁이 계속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일본과 지주에게 맞선다. 1937년엔 중일전쟁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을 군사기지화 하고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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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잘하랑께 님의 답변 | 2008-08-01 12:05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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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찬이예예 님의 답변 | 2008-08-16 14:06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순서

 

 

제1대 태조 : ①신의왕후 한씨(제2대 정종 및 제3대 태종 생모)-

                   ②신덕왕후 강씨


제2대 정종 : 정안왕후 김씨


제3대 태종 : 원경왕후 민씨(제4대 세종 생모)


제4대 세종 : 소헌왕후 심씨(제5대 문종 및 제7대 세조 생모)


제5대 문종 : 현덕왕후 권씨(제6대 단종 생모)


제6대 단종 : 정순왕후 송씨


제7대 세조 : 정희왕후 윤씨(추존 왕인 덕종 및 제8대 예종 생모)


※추존왕(追尊王) 덕종 : 추존 소혜왕후 한씨(제9대 성종 생모)

 

제8대 예종 : ①장순왕후 한씨-

                   ②안순왕후 한씨


제9대 성종 : ①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제10대 연산군 생모)-

                   ③정현왕후 윤씨(제11대 중종 생모)


제10대 연산군 : 폐비 신씨


제11대 중종 : ①단경왕후 신씨(치마바위전설 여주인공. 비련의 왕후)-

                     ②장경왕후 윤씨(제12대 인종 생모)-

                     ③문정왕후 윤씨(제13대 명종 생모)

                     ※후궁 창빈 안씨(제14대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의 생모)


제12대 인종 : 인성왕후 박씨


제13대 명종 : 인순왕후 심씨


제14대 선조(덕흥대원군 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의 3남) :

           선조의 왕후 : ①의인왕후 박씨-

                                ②인목왕후 김씨-

                                ※후궁 공빈 김씨(제15대 광해군 생모)

                                ※후궁 인빈 김씨[추존왕 원종(정원군)의 생모]


제15대 광해군 : 폐비 유씨


※추존왕 원종 : 추존 인헌왕후 구씨(제16대 인조 생모)


제16대 인조 : ①인렬왕후 한씨(제17대 효종 생모이자 소현세자 및 인평대군의 생모)-

                     ②장렬왕후 조씨


제17대 효종 : 인선왕후 장씨(제18대 현종 생모)


제18대 현종 : 명성왕후 김씨(제19대 숙종 생모)


제19대 숙종 : ①인경왕후 김씨-

                     ②인현왕후 민씨-

                     ③인원왕후 김씨

                    ※후궁 희빈 장씨(제20대 경종 생모)-

                    ※후궁 숙빈 최씨(제21대 영조 생모)

 

제20대 경종 : ①단의왕후 심씨-

                     ②선의왕후 어씨


제21대 영조 : ①정성왕후 서씨-

                     ②정순왕후 김씨

                     ※후궁 정빈 이씨[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후궁 영빈 이씨[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추존왕 진종 : 추존 효순왕후 조씨(제22대 정조의 양모)


※추존왕 장조 : 추존 경의왕후 홍씨(혜경궁 홍씨 : 제22대 정조의 생모)-

                      ※후궁 숙빈 임씨  

                        *장조의 후궁 숙빈 임씨는 제25대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의 친조모이자, 

                       철종의 조부(祖父)인 은언군의 생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의 양부(養父) 은신군의 생모


제22대 정조 : 효의왕후 김씨-

                  ※후궁 수빈 박씨(제23대 순조의 생모)


제23대 순조 : 순원왕후 김씨[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생모]


※추존왕 익종 : 신정왕후 조씨(제24대 헌종의 생모)


제24대 헌종 : ①효현왕후 김씨-

                     ②효정왕후 홍씨


제25대 철종(전계대원군 이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3남) :

           철종의 왕후 : 철인왕후 김씨


제26대 고종황제(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차남) :

 

        고종황제의 황후 : 명성황후 민씨(제27대 순종의 생모)-

        ※후궁 귀비 엄씨(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생모)-

        ※후궁 귀인 이씨(완친왕 생모)-

        ※후궁 귀인 장씨(의친왕 이강 생모) -

        ※후궁 귀인(복녕당) 양씨(덕혜옹주 생모)


제27대 순종황제 : ①순명효황후 민씨-

                           ②순정효황후 윤씨(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 

저가다쓴거........................

출처 : dws7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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