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죽음

죽음을 넘어서는 길 - 고전읽기

언러브드 2013. 4. 25. 10:42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문학은 죽음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꿈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문학사에서 이런 꿈은 대개 종교적, 철학적 신념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신념 없이 죽음을 넘어서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 불교, 유가, 도가 등의 사유는 고전 문학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을 밝혀 주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괴롭다

기록 문학과 죽음의 초월이 만나는 첫 장면은 아무래도 불교와 관련을 가진다.

《삼국유사》가 이 문제에 대한 거의 유일한 창고이기 때문이다.

먼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야기 <사복이 말하지 않다(蛇福不言)>를 만나 보자.

이 이야기는 불교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흥미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열두 살이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1)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며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사복이 원효에게 계(戒)를 주게 하자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이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가 고쳐서 말하였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2)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 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하였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또한 그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았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그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신라의 유명한 고승 원효와 무명의 이인(異人) 사복이 연출하는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이다.

원효도 길거리에서 춤을 추면서 불교를 전하고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기도 한 이인이지만 사복은 그보다 한 수 높은 인물이다.

그런 사복은 말도 못하는 아이였고, 어떻게 보면 살아서 특별히 한 것도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런 사복을 당대의 최고 승려인 원효와 견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비교가 가능할까?

열쇠는 '사복이 말하지 않다'라는 제목 뒤에 숨어 있는 사복의 몇 마디 말에 있다.

사복은 죽은 자신의 모친을 암소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이 발언 속에 불교의 생사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에서는 생명 있는 존재들은 끊임없이 삶의 바퀴를 이어 간다고 말한다.3)

삶의 다음 모습을 결정하는 요소는 지금 어떤 업보를 쌓느냐,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전생에 원효와 사복의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다는 사복의 말은 어머니에 대한 욕이 아니라 찬양이다.

전생에 좋은 업을 쌓았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에 장사를 지내러 간 사복은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깨달음의 노래를 남기고 모친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여기서 연화장이란 연꽃으로 만들어진 세계, 곧 불교에서의 정토(극락)를 말한다.

노래의 전반부에 나오듯이 석가모니가 든 열반, 곧 깨달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이다.

이 연화장으로 사복이 어머니의 시신을 지고 들어갔다는 것은 말도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했던 장애인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고,

더불어 그 사복을 키우다 죽은 어머니 또한 정토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갑작스럽고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원효는 하릴없이 발길을 돌린다.

고승을 우습게 만드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원효는 '너무 번거롭다'는 사복의 면박을 당하고 나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괴롭다'는 단구(短句)를 입에 올린다. 생사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압축한 말이다. 생사의 반복적 윤회가 괴로우니 그것을 넘으라는 뜻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그랬듯이 깨달음을 얻어 정토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복이 말하지 않는다>는 그 깨달음이 사복처럼 못난 존재에게도, 사복의 어머니같이 이름 없는 여성에게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사복이, 사복의 모친이 뭘 했기에?

두 사람은 보리수 아래서 고행을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았다. 속에는 비상한 깨달음이 감춰져 있는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 사복은 장애인이다. 사복의 어머니는 아버지도 없이 장애아인 사복을 키우며 갖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복이 말하지 않는다>는 그 안에 해탈이 있다고 말한다.

사복이 말도 못하고 몸도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악업을 쌓지 않은 것, 어머니가 그런 자식을 키우며 선업을 쌓은 것 등,

이런 평범한 실천 안에 연화장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복과 사복의 어머니가 띠풀 줄기 밑에 펼쳐져 있는 정토에 들어가고 오히려 고승 원효가 이승에 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것이 불교가 말하는 역설적 진리이고, 불교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이다.



이 같은 죽음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한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로 펼쳐지는 현장을 우리는

《삼국유사》의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金現感虎)>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이 이야기는 탑돌이를 하다 만난 두 남녀의 연애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따라간 처녀의 집에서 처녀의 정체가 드러나고, 오빠들의 악행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 예고되면서 갈등은 고조되고

연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의 압권은 바로 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유(類)가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市街)에 들어가 심히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이 저를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쪽의 숲 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이 말하였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하였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며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하였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호랑이 처녀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배필의 인연을 맺은 김현의 은덕을 갚겠다고 한다.

김현이 만류하자 호랑이 처녀는 저 유명한 '다섯 가지 이익(五利)'을 내세우면서 김현을 설득한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너, 가족, 나라 사람들로 확산되는 유익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 목숨'보다 나은 유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희생이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이런 희생을 불교에서는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전생담 가운데 한 왕자가 굶주린 호랑이 새끼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철저히 나를 버려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이다.

일연 스님이 호랑이 처녀와 김현의 사랑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실어 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눈여겨 읽어야 할 대목은 희생을 말하는 존재가 석가모니나 고승이 아니라 '호랑이'라는 점이다.

여자로 변신해 김현 앞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호랑이는 호랑이이다. 하지만 호랑이 처녀는 자신의 오빠들처럼 비린내에 코를 벌름거리지 않고 인간을 위해, 연인을 위해 몸을 던진다.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사복이 말하지 않다>에서 불경을 나르던 암소처럼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선업을 쌓은 것이다.

사실 이런 호랑이의 행위는 멀리 신화적 세계에 정신의 뿌리를 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 인간과 동물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였는데,

이런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특정 동물과 인간 종족이 피를 나눈 형제요, 자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우리는 토테미즘이라고 한다. 호랑이 처녀는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준 김현에게 자신의 몸을 선물로 내놓고, 김현은 호원사라는 절을 죽은 호랑이 처녀에게 선물로 바친다. 둘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를 넘어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 이 선물의 정신이 바로 불교의 보살행이다.

불교는 죽음을 존재의 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삶이란 해탈에 이르지 않는 한, 정토에 들어가지 않는 한, 다음 삶으로 건너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일 뿐이다. 그러니 이 삶을 초월하는 방법은, 아니 죽음을 이기는 길은 이생에서 선업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

호랑이 처녀처럼 타자를 위해 자신을 선물로 주는 방법도 그 한 길이다. 그렇게 선물로 주는 순간, 사복이 들어갔던 연화장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연화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띠풀 아래, 이승의 사복의 어머니와 같은 삶 속에 있다.

 

 



죽음 앞에서 쓰는 시

불교와 달리 유자(儒者)들에게는 윤회전생과 같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다.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려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는 유명한 일화 속에는 유자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잘 압축되어 있다.

이처럼 유자들은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지만 동시에 예(禮)의 관점에서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중시했다.

송나라 때 유학을 새롭게 구축한 주자(朱子)는 사람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 기운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이 감응한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유가의 죽음에 대한 이해의 일단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 불교가 출가를 통해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것을 중시하여 승려들의 결혼을 금지한 반면,

유가들은 제사를 잇는 것을 중시하여 후손을 귀하게 여겼다.

특히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학이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예의 정통성이 중요해졌다.

왕위가 맏아들을 통해 계승되어야 하듯이 조상에 대한 제사도 맏아들을 통해 잇는 것이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아들 낳는 일이 며느리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되었고, 제사를 맡은 맏아들이 재산 상속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17~18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일이다. <홍길동전>에서 서벌의 문제를 제기한 것도 적장자만이 상속과 제사의 권리를 지녔기 때문이고,

 <사씨남정기>의 사씨가 교채란을 첩으로 들인 것도 아들을 낳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렇게 장자를 통해 이어지는 제사, 그와 더불어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유가들이 아들을 통해 혈통이 이어지는 한 가문의 존재가 지속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도 내 삶이 후손을 통해 연속되므로 내 존재는 영속된다는 것이 생사에 대한 유가들의 신념이었다.

 

제사유교를 제사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아들을 통해 혈통이 이어진다는 신념 때문이다. 사진은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의 제사 지내는 모습이다.

 

 

혈통의 지속이 죽음을 넘어서는 유가적 방법이었기 때문에 자식의 죽음, 그것도 아들의 죽음은 더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외아들을 잃은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의 제문(祭文)은 그래서 더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부모 된 마음으로 어찌 차마 자식 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겠느냐.

하물며 너는 나이가 어려서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노성(老成)한 듯했고 재주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훌륭하게 될 실마리가 이미 드러났다. 말과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뛰어났지.

내가 잘못이 있으면 너는 진심으로 그 잘못을 지적해 주어 나는 늘 자중하고 조심하며 너를 내 지기(知己)로 여겼단다.

또 선천적으로 재주가 많아 잡술에 두루 능통하여 침술, 약술, 점술 등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지. 매번 절구(絶句)를 지을 때 말이 너무 슬프고 가슴 아파서 내가 다시는 그런 글을 짓지 말라고 경계했는데 끝내 그런 시 짓는 것을 고칠 수 없었지.

그 또한 세상에 오래 살 수 없음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글을 지은 것이냐. 아! 내가 어찌 차마 너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겠느냐.

네 관을 덮던 날, 나는 우리의 끝없는 정을 적어 너의 관에 넣었다.

 

소설 <최척전(崔陟傳)>의 작가로 문학사에 잘 알려진 조위한은 1625년 병으로 앓던 아들 의(倚)의 죽음과 마주한다.

그런데 그 아들은 보통 아들이 아니다. 외동아들일 뿐만 아니라 재주가 남다르고 조숙하여 아버지가 친구로 여길 정도로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조위한이 스스로 썼듯이 어떤 자식의 죽음이라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겠지만 유독 아끼던 자식의 죽음이 더 슬픈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이런 조위한의 슬픔이 집약된 곳이

"아! 내가 어찌 차마 너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겠느냐."라는 구절이다.

제사는 살아 있는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지내는 것이고, 제사의 지속을 통해 종족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아버지는 살아 있고 아들이 죽었으니 제사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가들에게 이보다 큰 고통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조위한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장유가 요절한 벗 김세민을 위해 지은 제문에서

"죽음이 그대의 마음을 망하게 하였으나 그대의 정신을 빼앗을 수는 없다."라고 토로한 것처럼 정신력으로 죽음의 슬픔을 이길 수는 있겠지만 정신력이 슬픔을 다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다.

유가들이 종종 불교에 마음을 의지한 것도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가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도 있었다.

이 역시 의(義)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 신념이 후손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생명도 신념도 영속될 수 있다는 죽음에 대한 이해의 결과이리라. 달리 말하면 신념으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는 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수한 사례 가운데, 우리는 1910년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만날 수 있다.

 

황현조선 후기의 유학자. 황현에게 자결은 유자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어진 삶을 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만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66~1910)은 삶을 고민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던 계획도 좌절된 터였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그보다는 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챗살처럼 많은 삶의 갈래 속에서 황현은 절명을 선택한다.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에 이르도록(亂離袞到白頭年)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네.(幾合捐生却末然)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今日眞成無可奈)
바람에 너울대는 촛불이 가을 하늘에 비친다.(輝輝風燭照蒼天)

새 짐승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린다.(鳥獸哀鳴海岳頻)
무궁화 강산은 벌써 가라앉았구나.(槿化世界已沈淪)
추등 아래 책 덮고 옛일을 생각해 보니(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에서 선비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목숨을 끊기 전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긴다. 시인은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날, 초가을 촛불 아래 앉아 마지막 시를 쓰고 있다.

외세가 국권을 넘보는 시기를 살아오면서 겪은 치욕과 근심으로 시인은 백발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이미 백두의 몸이 되었다.

생각하면 목숨을 끊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바로 오늘,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첫 수 네 번째 연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은 나라의 운명이기도 하고, 자신의 목숨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된 시는 세 번째 수에 이르면 감정이 극에 이른 다음 성찰로 치닫는다.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산천도 짐승도 괴로워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무궁화의 나라로 불려 온 땅이 무궁하지 못하고 꺼져 버렸으니 그 절망과 고통이 인간 세상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돌아보자니 배운 사람 노릇, 선비 노릇을 제대로 했느냐, 이런 반문이 폐부를 찌른다.

셋째 수를 써 내려가던 시인의 마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결국 시인은 선비로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더덕술에 아편을 타 삼킨다.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이나 된 나라가 망했는데 자결하는 선비 한 사람이 없다면 통탄할 일이라는 것,

이것이 유가인 황현이 죽음을 선택한 뜻이었다.

황현에게 죽음은 삶의 한 방식이었다. 그것이 바로 선비가 사는 길이었다.

이런 황현의 자결은 유가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나라의 벼슬을 한 적이 없으니 망한 나라나 왕에 대한 의리를 지킬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은 자결을 통해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룰 뿐이라고 하였다.

 


죽음 같은 현실을 벗어나는 길

유가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선택했던 이들도 있었다.

현실을 초월하되 불교가 제시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 다시 말하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합일을 이루거나 수련을 통해

인간의 존재 자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삼국 시대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해동도가(海東道家)의 전통, 서적을 통해 들어온 노장 철학의 생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도가적 지향은, 당쟁이 심화되어 지식인들이 정치적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었던 16세기 이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태도가 문학에서는 유선시(遊仙詩)나 인물전을 통해 잘 드러난다. 먼저, 심의(沈義, 1475~?)가 지은 <반도부(蟠桃賦)>의 일부를 살펴보자.

 

삶과 죽음 부질없음을 슬퍼하면서(悲生死之浮休兮)
티끌세상 벗어나 먼 길 떠났네.(超塵寰以遠徂)
하늘나라 신선 세계까지 올라가(跆上界之仙府兮)
아래 땅의 풀 더미를 굽어보았지.(俯下土之積蘇)


요지를 지나서는 돌아옴도 잊었는데(過瑤池以悵忘歸)
왕모가 날 이끌고 길을 인도하였네.(王母鉥余以啓途)
한 알의 신령한 복숭아를 주는데(贐一顆之神核兮)
그 향기 너무나 짙었다네.(芳酷烈其誾誾)


가만히 받아 씹어 삼키니(漠虛靜以咀嚼兮)
이 몸 문득 진인으로 되돌아가서(忽乎吾將返眞)
어지러이 두둥실 날아올라(紛仙仙而抯撟兮)
아득한 동해 바다 넘놀았다네.(逴絶垠乎東溟)

 

시인은 인간 세상을 벗어나 신선 세계에 이르러 반도(蟠桃)4)를 먹고 진인(眞人)이 되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물론 이 체험은 가상 체험이다. 유선시는 몽유록과 마찬가지로 시의 화자가 꿈속에서 신선계를 경험하고 돌아오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도부>도 그런 공식을 따르고 있다.

몽중의 가상 속에서 화자가 도달한 진인이란 선도(仙道)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최고 단계의 인간,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간이다. 시인은 상상을 통해 죽음이라는 육체의 한계에 갇힌 인간 세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것이 도가들 혹은 도가적 사유가 현실을 초월하려고 하는 방법, 곧 죽음에 맞서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반도부>의 작자는 왜 이런 상상을 했을까?

육체의 한계에 갇힌 삶을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고단할 때, 현실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싶을 때 그런 욕구는 더 커진다.

예를 들면 사화(士禍)로 인해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풍조가 지식인들 사이에 강했던 16세기가 그런 시대였다.

몽유록 소설의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의 작가이기도 한 심의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심의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동자였던 심정(沈貞, 1471~1531)의 동생으로, 중종반정 이후 1507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가

염증을 느끼고 바보로 자처하면서 벼슬을 그만둔 인물이다.

아마도 형이 벌인 일에 대한 불안, 시대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그는 결국 처형당한 형과 달리 사화를 면했고,

자신의 욕구를 문학에 담았다.

현실에서는 뜻을 펴지 못했던 최치원을 천자로 삼아 이상적인 문장의 왕국을 상상한 <대관재몽유록>이나 <반도부>에 드러난 진인의 형상은 16세기 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방법이자 그런 현실 자체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처형이라는 종말을 맞은 형과 달리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 수 없는 심의의 삶이 범상치는 않다.

 

현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사상이나 실천에서 심의보다 더 나간 인물이 허균(許筠, 1569~1618)이다.

허균은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도가적 사유나 삶의 태도가 잘 구현된 작품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이다.

<남궁선생전>은 여러모로 <홍길동전>과 가까운 작품이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 역시 율도국을 건설한 이후 선도를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승천하고 있지 않은가.

<남궁선생전>의 주인공 남궁두(南宮斗)는 전라도의 상당한 부자였다.

그가 서울에서 진사 벼슬을 하는 동안 고향에 혼자 남아 있던 애첩이 조카와 간통을 한다. 분통이 터진 그는 두 남녀를 활로 쏘아 죽이고 서울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일이 결국 탄로가 나서 붙잡힌 끝에 갖은 악형을 당한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남궁두는 삶에 회의를 느껴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중이 되는데,

거기서 한 노인을 만나 도가의 방술을 배우게 된다. 그 장면을 잠깐 들여다보자.

 

남궁두는 꿇어앉으며, "저는 어리석고 우둔하여 아무런 기예(技藝)가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방술(方術)을 많이 알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한 가지의 방술이라도 행하고 싶어 천 리 먼 길을 왔지만

1년을 지내고야 겨우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려 하오니 가르쳐 주소서."하였다.

장로(長老)가 "죽을 때가 가까운 사람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소." 하자 궁두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으나 굳게 거절하며 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궁두는 처마 아래서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호소하였고 아침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았으나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같이 여기며 결가부좌를 하고 참선에 들어가 사흘을 보냈다.

궁두가 갈수록 더 정성을 드리자 장로는 그때에야 그의 정성을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방은 한 길밖에 되지 않았고 목침 하나가 놓여 있으며 북쪽 벽을 뚫어 여섯 굽이의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자물쇠로 닫아 놓고 열쇠 하나를 감실 기둥에 걸어 놓았고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성품이 투박하여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으나 죽지 않는 방술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겠네."라고 했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그거면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로(長老)가 "대저 방술이란 먼저 정신을 모은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이라네. 더구나 혼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네.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하게나."라고 하였다.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나흘이 되도록 장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루에 한 차례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고도 전혀 배고프고 피로한 기색이 없어 마음으로 별다르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가르침을 받고는 온 정성을 다해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첫날 밤에는 앉아서 사경(四更)이 넘자 눈이 저절로 감겼으나 참아 내고 새벽까지 보냈으며, 둘째 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아 냈다.

셋째와 넷째 날의 밤에도 피로하고 고달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으나 머리를 벽에 찧으며 겨우 참아 냈다.

그러다가 일곱째 밤을 지냈더니 툭 트이듯 정신이 맑아져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로가 기뻐하며 "그대는 정말로 큰 인내력을 가졌으니 이루지 못할 일이 없겠네." 하고는 두 가지의 경전(經傳)을 꺼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제자가 된 남궁두는 날마다 경전을 읽고 벽곡(辟穀)과 호흡으로 기운을 조절하면서 장장 7년 동안 수련을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남궁두는 욕심을 부려 스승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지상선(地上仙)이 되어 800년은 살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게 된다. 그 후 남궁두는 스승이 시키는 대로 속세에 돌아와 신분을 숨긴 채 새로 장가를 들고 살았는데, 때마침 파직을 당하고 부안에서 살던 허균이 자신을 찾아와 선가(仙家)의 비결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남궁두가 엄청난 인내력을 가지고 수련했던 것처럼 도가가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은 초월적인 신에 기대는 방법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고 솔잎이나 검은 콩가루 같은 것을 생식하면서 호흡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마침내는 수련을 통해 인간의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따라서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 현실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고행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불우한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지식인들에게 도가가 특히 매력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궁두나 남궁두를 만난 뒤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허균이 그런 지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들에게 도가의 사유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죽음 같은 현실을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

불교나 유교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한반도 밖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더 근원적인 죽음에 대한 인식, 죽음을 넘어서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무속(巫俗)은 우리 내부에서 자생한 것이다. 그중 문학의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굿을 할 때 부르는 무가(巫歌)이다.

무가에는 죽음에 관한 한국인들의 근원적인 사유가 스며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주인공의 저승 여행을 다룬 <바리데기>이다.

<바리데기>는 죽을병에 걸린 부친을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 막내딸 바리데기가 저승을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대왕마마 내외가 한날한시에 똑같이 병이 들어 시녀 상궁들은 걱정이 많았다. 하루는 대왕마마가 상궁을 부르더니,

 "옛날의 문복이 용하더구나. 가서 점 한번 쳐 보아라."하고 문복할 것을 명하였다.
상궁이 천하궁의 갈이 박사를 찾아가 점괘를 들었다.
"동쪽에는 해가 떨어지고 서쪽에는 달이 떨어지니 양전마마가 한날한시에 승하하리다. 바리 공주의 사처를 찾으소서."
상궁으로부터 점괘를 들은 대왕마마는 길게 탄식하였다.
"종묘사직을 뉘게다 전하고 조정 백관은 뉘게 의지할고, 만백성은 뉘게 의탁하고, 시녀상궁은 뉘게 의지할쏘냐."
눈물을 흘리다가 언뜻 잠이 들었는데 뜰 가운데에 난데없는 청의 동자가 나타나 절을 한다.
"어떠한 동자인데 깊은 궁중에 들어왔느뇨?"
동자가 올라와서 아뢴다.
"양전마마가 한날한시에 승하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조정 백관에 원망이 있더냐? 시녀상궁에게 원책이 있더냐? 만인에게 원한이 있다더냐?"
대왕이 묻자 동자가 대답한다.
"원책도 아니고, 원망도 아닙니다. 옥황상제가 점지한 칠 공주를 버린 죄로 그러합니다."
"그러면, 어찌 다시 회춘하리오?"
"다시 회춘하려면 동해 용왕과 서해 용왕이 있는 용궁에서 약을 잡수시거나,

삼신산 불사약과 봉래방장 무장승의 양현수(藥水)를 얻어 잡수시면 회춘하리다. 바리 공주 사처를 찾으소서."
하고 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깨어보니 남가일몽 꿈이었다.
대왕마마는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았다.
"약수를 얻어다가 나를 회춘시킬 신하가 있는가?"
"동해 용왕도 용궁이고 서해 용왕은 천궁이고 봉래방장 무장승의 양현수는 수용궁이라 살아 육신은 못 가고 죽어 혼백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거행할 신하가 없습니다."
신하들이 아뢰는 말을 들은 대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용상을 치며 탄식하였다.

바리데기의 부친인 대왕이 죽을병에 걸린 것은 하늘의 뜻이 있어 점지된 일곱 번째 공주를 버린 탓이다.

대왕은 종묘사직을 이을 아들을 원했지만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대를 배반하고 태어난 막내 공주를 버린 것이다. <바리데기>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버려서는 안 되는 존재를 죽으라고 버린 잘못이 이 무속 신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무속 신화의 방법이다.

병을 치료할 방법이 내부에는 없다는 것이다. 궁 안에 있는 공주와 신하들 가운데 약을 구하러 갈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약은 이승에는 없다. 약을 구하려면 버린 일곱 번째 공주를 찾아야 하고, 죽어 혼백만 갈 수 있는 저승에 가야 한다.

 <바리데기> 신화는 이승의 문제를 저승을 통해, 왕궁 내부의 문제를 왕궁 외부로 버린 존재들 통해, 아버지 혹은 부모의 문제를 딸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나의 문제를 너를 통해, 너의 문제를 나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무속 신화식 문제 해결 방법에 무속의 죽음에 관한 상상, 죽음을 넘어서려는 길이 숨어 있다.

무속에서 죽음의 세계는 이웃에 있는 벗처럼 삶에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잘 모셔야 산 자의 삶도 편안해질 수 있다.

이승의 상대편에 저승이 있으므로, 이승의 삶을 마치면 저승에 가고 저승에 있다가 때가 되면 이승으로 나오기도 한다.5)

이승과 저승이 서로 벗처럼 서로 잘 어울려 있을 때 이승의 삶도 저승의 삶도 편안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더 확장해 보면,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바리데기> 신화를 통해 드러나는, 무속이 죽음을 넘어서는 길은 바로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인식이 아닐까?

다시래기장례 풍속의 하나로, 출상하기 전날 밤 초상집에서 상두꾼들이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노는 놀이이다. 이는 죽음을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진도 다시래기 재연 장면.

 

상례 가운데 '다시래기'라는 진도의 민속 의례가 있다.

슬픔이 지극한 장소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놀이를 벌인다는 역설적 사고가 이 놀이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놀이의 압권은 출산 장면이다. 초상집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라는 역설은 다시래기라는 전통적인 우리의 민속 의례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죽음을 어떻게 넘어서는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삶으로 연결되는 통과 의례 과정이라는 생각이 이 의례 안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진도의 무속인 다시래기 의례와 <바리데기> 무가는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읽어 내야 할 무속의 길이 있다. 그것은 <바리데기>의 마지막 대목에 잘 드러나 있다.

천신만고 끝에 저승에서 약수와 환생화를 구해 와 부친을 살려 낸 뒤 다음과 같은 장면이 이어진다.

 

환궁하여 정좌한 후에 대왕마마는 바리 공주에게 물었다.
"이 나라 반을 베어 너를 주랴?"
"나라도 싫소이다."
"그러면 사대문에 들어오는 재산 반을 나누어 너를 주랴?"
"그도 다 싫소이다. 그간 저는 죄를 지어 왔나이다."
"무슨 죄를 지어 왔는가?"
"부모 위해 약수 구하러 갔다가 무장승을 만나 일곱 아들을 낳아 왔나이다."
"그 죄는 네 죄가 아니라 우리 죄라."
대왕마마는 무장승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잠시 후 신하들이 돌아와 아뢴다.
"광화문에 사모뿔이 걸려 못 들어오나이다."
"옥도끼로 찍고 들어오게 하라."
무장승이 입시하니 대왕마마는 깜짝 놀라 "몸 생김이 저만하고 일곱 아들 있다 하니 먹고살게 하여 주마." 하자,

"비리공덕 할아비와 할미도 먹고 입게 제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바리 공주는 자신의 양부모인 비리공덕 할아비 할미의 은덕을 아뢰었다.

대왕마마는 모두에게 골고루 은덕을 베풀어 제도해 주었다.

 

바리데기<바리데기>는 오늘날에도 창작 판소리극이나 소설 등으로 재창작되거나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의 왼쪽은 바리데기 설화를 소재로 한 판타지 발레 <바리>(1998)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은 연극 <바리데기> 포스터이다.

부왕은 자신을 구한 딸에게 나라의 절반, 재산의 절반, 말하자면 권력과 부를 답례로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이를 모두 거부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저승은 죽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바리데기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저승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자신이 오히려 죄인이니 단죄하라는 것이다. 부모 허락도 없이 결혼해 아들 일곱을 낳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속내를 뒤집어 보면 무장승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으면 약수를 구할 수 없었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 말은 결국 '네 죄가 아니라 우리 죄'라는 부왕의 잘못을 시인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죽을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하늘이 낸 딸을 버려서도 안 되고, 아들에 그렇게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왕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을 저승에서 온 무장승 때문에 부수지 않을 수 없다는 삽화도 부왕이 죄를 시인하는 장면의 변주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양부모의 은덕에 대한 보답이다. 덕분에 비리공덕 할미와 할아비는 신이 되어 제사를 받게 된다.

이처럼 바리데기는 자신에 대한 보답보다는 타자들에 대한 보답을 바란다. 철저히 자신을 버리는 자기희생의 삶을 바리데기는 보여 준다.

바리데기가 망자의 저승길을 인도하는 저승의 오구신이 되거나 판본에 따라 무당이 되어 죽은 영혼을 저승에 인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이런 자기희생의 연장선에 있다. 말하자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희생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려는 의식이 <바리데기> 무가 안에, 그리고 무속과 신화 안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불교와 신화가 만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의 호랑이 처녀가 자기희생을 통해 다섯 가지 유익을 이루었듯이 <바리데기>의 바리데기 역시 자기희생을 통해 보모를 살리고 양부모를 봉양하고, 자신은 종신토록 망자를 인도하는 일을 하는 등 여러 유익을 이룬다.

현실의 무속이 지닌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무속이 죽음을 넘어서는 길을 우리는 <바리데기>를 비롯한 무가와 민속 의례 속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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