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죽음

죽음의 한 연구(박상륭) – 죽음에 대한 소설적 탐색

언러브드 2013. 4. 25. 08:21

목차

  1. 죽음이란 무엇인가
  2. 메타 구조로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
  3. 연금술의 정체
  4. 소설인가 아닌가
  5. 더 생각해볼 문제들
  6. 추천할 만한 텍스트

 

죽음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인간 삶의 비밀을 다룬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인간학적, 그리고 인문학적 성찰은 모든 인문과학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경우에도 더없이 중요한 주제이다.

 

탄생과 성장, 사랑과 이별, 슬픔과 고통 등, 삶의 모든 국면들을 다루면서 그것이 갖는 인간적 의미를 캐묻는 작업이

바로 소설의 작업인 셈이다. 삶의 의미를 궁구하는 작업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할 때, 죽음 또한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관장하고 해석하는 유의미한 전망으로서 종교가 존재하고 또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에 의미 있는 지침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삶의 직접적 연장이자 궁극적 귀결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또한 소설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한다.

 


1973년에 발표된 박상륭의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종교적 고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왜 이 문제를 소설적으로 다루었는지를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삶이 끝내는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삶을 죽음의 시작이라고 보는 역설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죽음은 인간이 직면하는 단 하나의 진정한 리얼리티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추체험(追體驗)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나, 죽음만은 다른 이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환치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사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회적인 것이며, 다른 이의 체험으로 전이될 수 없는 유일무비(唯一無比)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에 내재된 공포이자 신비며 미스터리와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죽음은 소설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작품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소설적으로 그리고 학술적으로 탐색1)해 들어간 작품이다.

주제 자체가 죽음이고 또 방법론 자체가 일종의 '연구'를 표방한 까닭에, 이 소설은 기왕에 우리가 친숙해져 있는 허구로서의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한 허구적인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의 행위와 사고를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설의 형식을 밟고 있으나,

그의 사유의 전개라든가 행위를 진전시키는 맥락 등에서는 불교 및 기독교의 인간관 및 죽음관을 참조함으로써

일종의 학술적 에세이로서의 면모도 강하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상륭의 이 소설은 소설인 동시에 철학적 에세이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개인적 사색인 동시에 동서양의 종교적 경전에서

탐구된 죽음에 대한 직관에 대한 개괄적 해설서이기도 한 셈인데,

이런 복합적인 양상이 박상륭의 소설을 우리 문학사상 아주 이질적인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대한 일차적 접근은 일단 그 이야기 내용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 유용하다.

이 소설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한 문제적인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을 완수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다.

죽음의 한 연구』의 이야기는 주인공 인물이 스승에 의해 유리(羑里)라는 황폐화된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유리로 오는 도중 그는 한 노승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유리에 들어와 존자승과 외눈박이 중을 죽이는 등 이른바 구도적인 살인을 행하는가 하면,

유리의 오조(五祖) 촌장을 죽여 그로부터 해골을 물려받아 스스로 육조(六祖) 촌장이 된다.

그리하여 촌장에게 요구되는 바, 황폐화된 마을 유리에 생명의 바닷물을 되돌리기 위해 마른 늪에서의 낚시질로 상징되는 형벌을 감내하면서 죽음과 재생의 의미를 고찰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결국 일방으로는 자의에 의해, 그리고 일방으로는 유리의 법률에 의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완성한다.


이것이 인물의 행위와 사건 중심으로 아주 단순하게 요약한 작품의 줄거리인데, 이런 요약만으로는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완수하는 과정이

어떻게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탐색으로 확장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유년 시절을 참고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작품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유년의 회상이 다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비중 있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회상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어머니는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였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뱃사람들이 창녀인 그의 어머니를 빼앗아 가는 것을 자주 목격하면서 자라는데,

이런 경험으로부터 어머니와의 분리(分離)를 강렬하게 경험한다.

주인공에게 이런 경험은 결국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실존적인 경험이 되는데,

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자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부터 죽음의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화두처럼 각인된다.

그리하여 그는 유리로 들어오는 길에 만난 노승이 자신과 헤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고 그가 일종의 꿰미처럼 자신을 얽어매어 끌어들이는

윤회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뒤이어 "그는 어째서, 근 백 년 가까이 보류해 왔던 죽음을 하필이면 내 앞에서 치러 보여 준 것인가?"라고 의심을 품으면서,

그러한 윤회의 고리로부터 영구히 벗어나는 길은, 자기 소멸을 완전히 성취해 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회의하기 시작하는 것인데,

바로 여기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그의 탐색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그는 위와 같은 인식을 통해 삶과 죽음의 윤회라고 하는 업(業, 업보)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를 희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의 그의 고뇌와 사색이 이제 소설의 중심 주제로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메타 구조로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자유로워짐과 그것을 통한 영생의 획득이라고 하는 지고의 목적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먼저 선불교(禪佛敎)의 화두에 기대어 그 문제를 풀어 간다.

소설에서 그것은 아래와 같이 서로 상극하는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의 게송(偈頌)으로 대표되는데,

이 두 게송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과 그 이외의 수도승들의 탐색의 본질과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은유로 기능하면서

주인공의 본질적인 죽음에의 탐색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를 알려 준다.

 

(ㄱ) 몸이 보리수이니
마음은 밝은 거울틀과 같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며 티끌 못 앉게 하세

(ㄴ) 보리에 본디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닌데
본래 한 물건도 없는 터에
어디에 먼지며 티끌 앉을까

 

위에 인용한 (ㄱ)과 (ㄴ) 두 게송은 각각 중국 선종(禪宗)의 두 선사(禪師)인 신수와 혜능의 게송으로 두 사람이 지녔던 화두이자

또한 각자가 도달한 득도의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ㄱ)의 게송이 육체를 긍정하고 그것을 통한 구도의 완결성을 드러내는 반면에

(ㄴ)의 게송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불교적 인식대로 육체 자체의 무의미성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육체 자체의 존재를 문제 삼을 경우 그것을 통한 구도의 완결성은 아무 근거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이분법적 인식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완수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의식은, 그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의 길로서

'필멸할 신육(身肉) 속에서 불멸할 신육을 뽑아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데,

이 지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모든 중생들의 궁극적 해탈에의 과정을 하나의 서사적 목적론으로 마련하고 있는

불교적 담화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인공이 죽음에 대해 사색하는 과정에서 참조하는 참조점은 비단 불교적 담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기독교의 담화 또한 기본적으로는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는데,

이 점은 죽음과 재생이 되풀이되는 순환의 비의에 대한 그의 탐구의 연장으로서 행해지는 기독교의 설화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작품의 '제17일'에서 나타나는 읍내 장로 집에서의 그의 설법에서 나타나는데, 원죄와 결부된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시작되는 그의 해석은 종교적인 인식 논리를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원죄는 모든 생명 있는 것 위에, 하나의 시련, 그리고 하나의 통로로서 놓여 왔다.

 

2. 원죄는 에덴동산의 실과를 뱀의 꼬임에 빠진 이브가 따서 먹고 다시 아담에게 권하는 순서를 밟거니와,

  여기서 뱀과 어머니 자연은 죽음의 한 원형(原型)이지만, 한편으로는 신 자신이 인간을 '파괴될 성질의', '완전치 못한', '물질'인 흙을 취해서

 만든 만큼 이미 그 속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또한 죽음의 결과에서 부활 또는 중생(重生)으로 이어 주었던 사다리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산의 중앙에 심어진 나무는 일종의 우주수(cosmic tree)2) 이기도 한 것이다.
3. 에덴동산의 나무와 예수가 죽을 때의 십자가는 양자 공히 위와 같은 의미에서 생명의 나무이지만, 전자는 생명의 동산에 심어진 나무이며   후자는 해골의 골짜기에 심어진 나무로서 이중성을 갖는 바, 이것은 '연꽃에 담긴 보석'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동물적 윤회가 완벽히 성취된 전형으로서, 여기서 죽음은 '육신으로 자궁에 들어, 살을 썩이고 영으로 싹을 키운' 동물적 윤회의 과정이 된다. 따라서 이브는 최초의 여성으로서 하나의 죽음의 장소, 중생의 태(胎)가 된다.
4. 이러한 원죄의 과정은 또한 신의 죽음에의 예비이기도 하며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를 빌려 말하면 '신의 인육화와 인의 신육화' 그리고 '한 정신의 우주적 정신으로의 확산과, 우주 정신의 개아(個我)에의 제휴, 한정된 삶의 영생에의 획득과, 영겁과 죽음의 한정된 삶에의 현현'으로 해석된다.
5. 따라서 성경은 결국 생명이 멈출 때라야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한 번의 완전한 죽음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책인 것이다.

 

물론 단순화에 따른 의미 축소의 위험성이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위에 요약된 부분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이 행하는 성경 해석의 주요한 명제이며 그 논리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주인공이 유리에 들면서부터 스스로 부과한 죽음과 재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그가 촌장이 되어 감수하는 마른 늪에서의 고기 낚기라는 형벌과도 연결된다.

즉, 주인공은 작품의 '제10일'과 '제11일'에서 고기에 대해 사념(思念)하는데, 처음에 그는 이른바 양극을, 해탈의 한계를 구획한다는

존재의 비극과 직면하지만, 곧바로 성서의 비유를 토대로 그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중생(重生)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고를 통해 주인공은 불교와 기독교가 공히 인간의 죽음과 해탈 및 영생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나 그의 인식은 비단 여기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는 오늘날 우리에게 연금술3)이라고 알려진 것 또한 이런 죽음에 대한 인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방향으로까지

자신의 사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의 정체

일반적으로 연금술이라 하면 기본적인 금속을 이른바 철학자들의 화병을 통해 금(金)으로 변형시키는 기술을 지칭한다.

이러한 연금술의 과정은 다양한 재료들을 순수화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은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순화의 과정은 금속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그리고 금으로서의 재생을 수행하기 위해 기본적인 금속의 신체를 죽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죽음과 재생, 신체와 영혼, 금속과 금 등의 기존의 이분법적 대립은 용해된다.

이런 연금술적 과정은 비단 물질적인 차원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차원도 또한 지닌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연금술은 우주에 대한 어떤 철학적인 견해의 타당성을 물질적 차원에서 실험적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금술적 과정은 그 가장 기본적인 의도와 작업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을 현재의 감각에 잠긴 상태로부터

그것이 처음 강조되었던 우주적 차원의 완전성과 고귀성을 재생시키는 기술인 것이다.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 그의 스승은 그를 유리로 보내면서 그로 하여금 그의 탐색을 자신 속에서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한 질료가 금이 되기까지는, 열두 번이나 일곱 번의 죽음, 뭉뚱그려 적어도 세 번의 죽음을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본격적으로는 위의 성경에 대한 해석에서 보듯이 주인공은 신이 '파괴될 성질의', '완전치 못한' 그런 조악한 '물질'을 취해서

사람을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바로 중생을 위해서는 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불완전한 죽음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몸은 불멸한 신육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조악한 '흙'의 집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장차 파괴될 그 '불완전성'을 병독(病毒)으로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금을 키워 내는 철학자들의 병으로서의 '해골의 골짜기'와 불완전한, 하지만 언제라도 철학자들의 병에 넣어져

연금술적 과정을 거치면 금으로 될 가능성을 항시 지니고 있는 원초적 질료로서의 인간의 사대(四大)와,

그리고 그러한 연금술적 과정의 결과로서 생겨날 완벽한 형식인 금으로서 '불멸한 신육' 사이의 유비(類比)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17일'의 설교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듯, 이러한 연금술적 과정은 그것이 논자에 따라 몇 단계로 이야기되든 간에,

그러한 기본적인 재료들이 금으로 화하기 전에 연금술적인 병 속에 넣어져 검은색으로의 변화를 거쳐 곪아 터지고,

그런 다음에 자유로워지고 순수해지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재료를 금으로 변형시키는 연금술적 과정 속에서 죽음과 재생, 신체와 영혼, 금속과 금 등의 기존의 이분법적 대립은 용해된다.

따라서 이들 짝은 서로 통합될 두 개의 실체가 되는 셈인데, 연금술사들은 종종 이 짝을 남성과 여성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들의 통합이 대립적인 것들의 통합의 원형4)을 표현한다고 하며, 그 통합의 결과는 남녀 양성(Androgyny)5)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완전하게 균형 잡힌 개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유리의 수도부와 샘에 이르러서 서로의 손을 교차해서 맞잡고 샘 아래로 앉는 장면도

연금술적 담화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신성혼(神聖婚)의 장면으로서 정신분석학자 융에 의해 연금술의 중심적인 이미지라고 지적된 장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한 연구」에서의 주인공과 유리의 수도부와의 연금술적 혼례는 따라서 주인공이 필멸할 신육으로부터 불멸할 신육을 뽑아내는 탐색 과정상의 한 중간적 단계이다. '제17일'에 나타난 도형 상징을 따르면 이것은 불완전하여 변형되어야 할 우주의 남성적 국면으로서의 사각형이 그것을 변형시킬 완전한 형식의 모체인 여성적인 원(圓) 안에 내접한 상태를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성경 해석에서 정리되었듯이

 '해골의 골짜기에 선 십자가'나 '연 속에 담긴 보석'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의 한 연구』는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탐구 및 그 실천에 이르는 과정을 불교와 기독교의 서사의 틀은 물론

이른바 연금술적 담화의 틀에 기대어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물의 죽음의 과정이며 그에 대한 사색의 플롯이 불교 및 기독교 그리고 연금술에서 이미 마련된 변형과 생성의 원리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그러한 제반 종교적 서사를 메타 구조로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인가 아닌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죽음의 한 연구』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인간 존재의 궁극의 신비에 대한 정신적 탐색을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담화, 그리고 연금술의 담화를 토대로 삼아 소설적 논리로 구성하고 있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자연 자체가 하나의 죽음과 재생의 순환 과정이듯, 그러한 자연의 요소인 흙이라는 불완전한 물질로 빚어져 유한한 삶을 살아가도록 처해진 인간의 삶 또한 죽음과 재생의 순환을 밟을 수밖에 없는 바, 불멸할 신육을 얻기 위해 우리가 치러 내야 하는 죽음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이 소설은 철학적으로 궁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소설을 두고 형이상학적 소설이니 철학적 소설이니 하는 분류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작품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일관하고 있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작품 뒷면에 작가가 마련한 다수의 참고 문헌과 그로부터 도출한 주석들의 존재도 이런 의문을 증폭시킨다.

또한 범인류적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재생산되는 하나의 심적인 조직 즉, 원형을 상정하고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 구현되는 작용으로서 죽음과 재생의 신비를 이해한다고 해도, 죽음 이후의 인간 존재의 지속 가능성은 여전히 불가지(不可知)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인 만큼 그것이 과연 일정한 완결을 요구하는 소설 장르에 부합하는지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그동안 우리가 현실적 생존에 급급하는 동안에 망각하고 있었던, 이제는 상당히 세속화되었으나 누구에게라도 닥칠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음에 대한 그의 소설적 탐색이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미완의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바로 그러한 한계의 자각 때문에 인간의 삶은 죽음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아 볼 만한 그 어떤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박상륭의 이런 작업은 이 작품의 속편인 『칠조어론』 연작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는데, 이 일련의 작품을 우리가 궁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죽음의 한 연구』는 본문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소설이면서 동시에 학술적 에세이로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소설적으로 가능하긴 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박상륭 식의 접근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나아가 소설이 인간 이해에 기여하는 몫이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자.

2. 박상륭의 소설은 불경과 성경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 연금술의 비의(秘意)를 담은 책, 티베트의 경전 『사자(死者)의 책』,

그리고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융의 저작 등 광범위한 참고 도서를 기초로 씌어졌다.

특히 초기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상당수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나 불교 경전을 정리한 『팔만대장경』과 같은 책에서 발상법을 얻거나 그 책에 수록된 인류학적 자료를 활용하기도 하는 등 인접 학문의 성과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상관성으로부터 인문학적 상상력이 현대사회에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3. 박상륭 소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신화의 이야기를 소설적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화는 이미 효용을 다한 오래 전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이스의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에일리언』과 『반지의 제왕』을 위시한 최근의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차용되고 있다.

신화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나아가 신화적 인간 이해가 오늘날과 같은 첨단 문명사회에서 재생산되고 재해석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추천할 만한 텍스트

『죽음의 한 연구』, 박상륭 지음, 문학과지성사, 1986/1997.

각주

  • 1) 탐색이란 신화와 문학에서 주인공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문학에서 탐색의 대상은 영웅에게 지대한 노력을 요구하는데, 영웅은 이러저러한 난관을 극복한 후 이 대상을 차지한다. 많은 경우 이 탐색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신적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오든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조셉 캠벨은 신화적 영웅의 일대기를 문법화하면서 영웅의 탐색으로 플롯이 짜여진 이야기들을 '탐색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 2) 나무는 많은 원형적 상징들 중의 하나로서, 세계의 축이라고 하는 개념을 표현한다. 이것은 세계가 선회하는 중심점이자 우리 세계의 다양한 영역들,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지하 세계 등을 상호 연결하는 지구의 배꼽을 의미한다. 우주수(宇宙樹)는 양육과 풍요, 보호 등을 의미하는데, 우주수가 갖고 있는 이러한 기능들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보존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속에서 사용되는 성황당 나무라든가 민간의 다양한 솟대 등이 이에 해당된다.
  • 3) 화학의 고전적 형식으로,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실험화학을 자연과 인간에 관한 일반적, 상징적, 직관적, 의사 종교적 명상과 결합한 것이다. 미지의 질료에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의 내용이라고 인식하는 많은 상징들이 투사된다. 연금술사들은 미지의 질료 속에서 "신의 비밀"을 탐색하며 그럼으로써 오늘날 무의식의 심리학의 그것과 닮은 탐험의 과정에 착수한다. 연금술사들의 최고의 목적은 일반적인 금속을 금이나 은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모든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치료제를 창조하는 것이다. 유럽의 연금술은 이른바 '현자의 돌'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필수적인 성분으로 믿어진 하나의 신비적인 질료이다.
  • 4) 분석심리학자인 융이 제창한 개념으로, 유전적 형질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시대라든가 인종, 지역과 무관하게 유전되는 심적인 자질을 일컫는다. 원형은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도출되는 보편적인 패턴이나 모티프들로서 종교와 신화학 등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원형은 꿈이나 환시와 같은 형식을 통해 개인에게 출현한다. 물이 암시하는 바, 죽음-재생의 모티프, 숫자 상징과 도형 상징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 5) 남녀 양성 혹은 양성구유라고도 불려지는 이것은 한편으로는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의 혼합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적이지도 않고 여성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융의 개념에 의하면 남성 속의 여성적 특성인 아니마와 여성 속의 남성적 특성인 아니무스의 균형을 의미하기도 한다. 양성구유적 특성들은 어떤 젠더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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