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죽음

죽음의 두려움과 슬픔 -고전읽기

언러브드 2013. 4. 25. 10:21

 

죽음은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의 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운 순간이다.

더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의 죽음 이후 펼쳐지는 상황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 그 상황이 내 앞에 불현듯 도래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남긴다.

 

 

남편을 잃고 아내를 여의고

우리 문학사의 첫 장면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죽음이 문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있을까?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바로 그 예이다.

 

여보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당신은 그예 물을 건넜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니(墮河而死)
아아 당신을 어찌할거나(當奈公何)

 

어느 새벽 옛 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흰머리를 풀어헤친 사내가 술병을 들고 거센 물결 속으로 들어가고

아내인 듯한 여자는 따라가며 말리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내의 만류를 뒤로하고 사내는 결국 시구처럼 물길에 휩쓸려 자취를 감춘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잠긴 여인은 공후(箜篌)를 뜯으며 슬픈 노래를 한바탕 부르고 나서 남편의 뒤를 따른다.

<공무도하가>는 바로 이 여인이 남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부른 노래이다.

<공무도하가>에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의문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작자는 누구인가?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인가, 곽리자고인가,

아니면 사연을 전해 듣고 공후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인가?

죽음을 노래한 슬픈 서정시일 따름인가,

아니면 죽음과 재생이라는 고대의 주술적 제의를 다룬 상징적 노래인가?

심지어 창작자, 창작 지역, 기록 형식을 근거로 하여 우리 시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까닭은 역시 죽음과 그에 따른 슬픔 때문이다.

세상 죽음 가운데 슬프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가까운 혈육이나 가족의 죽음은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한다.

<공무도하가>는 술에 취해 강물로 뛰어드는 남편을 어쩌지 못한 아내의 슬픔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내를 술과 강물로 이끈 것이 현실의 고통인지 존재의 불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것도 여자는 해결할 수 없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아 당신을 어찌할거나"와 같은 탄식이고 체념이다.

배경 설화에 따르면 아내의 동반 자살은 이 체념의 극적인 표현인 셈이다.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은 또 다른 죽음을 깨우는 것이다.



한 여성에게서 남편의 죽음은, 더구나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편의 죽음은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사태였을 것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대에는 더했으리라.

16세기 안동의 선비 이응태의 아내가 남편의 무덤 속에 넣어 준 한글 편지에도 그런 막막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슬픔의 감정은 아내를 잃은 남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남편들의 슬픔은 주로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는 애도문(哀悼文)이나 제문(祭文)에 잘 나타나는데, 안민학(安敏學, 1542~1601)이 죽은 아내를 추도하며 쓴 글도 그런 사례이다.

 

남편 안민학은 아내 곽씨의 영혼 앞에 이야기하오.
나는 임인년(1542) 생이요, 그대는 갑인년(1554) 생으로 정묘년(1567) 열엿새 날에 결혼을 하니, 그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대는 열세 살이었소. 나는 아버지 없는 과부의 자식이고, 그대는 가난한 홀어미의 자식으로 우리는 만났소.

그대는 어린아이였고 나는 어른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나는 뜻이 굳지 못했소.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라 부부 간에 지켜야 할 법도가 중요한 도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대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소.

그러니 그대와 정답게 말 한마디 나누고 같이 앉아 밥 한 끼 먹은 적이 있었겠소.


나는 그대에게 밤이나 낮이나 늘 가르치기를, 어머님 받들어 모시는 데 온 정성을 다하고 지아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부인네의 도리라고 하였소. 그렇게 십 년이 흘렀지만 그대는 내 뜻을 어긴 적이 없소. 하지만 가난한 집에 홀로된 시어머니가 계시고 나 또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재주가 없어서 집안일을 잘 챙기지 못했으니, 어머니 받들어 모시는 도리를 다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소.
그대는 자신이 입을 옷은 못 짓더라도 행여 옷감이 마련되면 내 옷을 지어 주려고 했소.

겨울에도 저고리와 장옷, 누더기 치마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바지도 입지 못한 채 차가운 방에서 견뎠으니,

그대의 고생이 그보다 더할 수 있었을까?
그대가 점점 자라 키가 커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장난으로 놀리며 말하곤 했소.
"내가 그대를 길렀으니 나를 더욱 공경해야 할 게요."

지금 그대는 죽어 넋이 되었지만 어찌 이 말을 잊었겠소.

 

이어지는 진술을 따라가 보면 아내 곽씨는 어린 나이에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갖은 고생을 하고 산후 조리를 잘못하여 병을 얻었다가

다시 유산을 하는 바람에 병이 깊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조선 시대에 흔히 있던 가난으로 인한 병과 죽음이었지만 스물셋, 아직은 청춘이다.

그 고통 속에서 남편은 과거를 회상한다. 어리고 헐벗었지만 도리를 다하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 남편은 통곡한다.

그러나 그 통곡은 살아 있는 어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되어 속으로 삭이며 우는 통곡이다.

남편은 죽은 아내 앞에서 "그대 삼년상을 지내고 좋은 아내를 구해 우리 자손을 잇는 데 어려운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하오."라는 다짐을 한다. 조선 시대의 사정1)을 생각한다면 하기 어려운 다짐이다. 그만큼 죽은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안민학의 애도문은 1576년 5월 10일, 입관할 때 넣은 글로 1978년에 묘를 이장할 때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글은 임진왜란 이전에 쓰인 한글 애도문이어서 문학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고생한 아내를 잃은 조선 선비의 슬픔과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라는 데에도 남다른 가치가 있다.

 

 

 

누이의 죽음을 견디며

우리 문학의 역사에서 남편이나 아내의 죽음 못지않게 하나의 전통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누이의 죽음에 대한 아픔과 슬픔의 노래이다.

이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정서적 표현을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신라의 향가인 <제망매가(祭亡妹歌)>이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는데 두려워하여
너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미타찰에서 만나게 될 너
도를 닦아 기다리겠노라

 

향찰(鄕札)2)로 기록된 이 노래에는 한 사내의 슬픔이 드러난다.

그 사내는 월명사(月明師, ?~?)라는 당대의 유명한 승려요, 향가의 가객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명사는 경덕왕 시절,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출현한 괴변을 <도솔가>를 지어 불러 해결한 신화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화랑의 일원이자 승려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그도 죽은 누이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지라 누이를 위해 제(祭)를 올리면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종이돈을 휘감아 서쪽으로 사라진다.

종이돈은 죽은 사람이 극락에 갈 때 쓰라고 뿌리는 노잣돈이니 누이의 영혼은 서천극락(西天極樂)으로 건너간 것이다.

<제망매가>는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무와 나뭇잎이라는 절묘한 비유를 끌어들이고 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하므로 이를 통해 불교의 윤회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도 그러한 것이다.

죽음이란 깊은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뭇잎은 저마다 지는 때가 다르고 바람에 날려 가는 곳도 다르다.

이승에서 잠시 오누이의 인연을 맺었지만 죽음이 그것을 이승과 저승으로 쉬이 갈라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이의 요절은 지극한 슬픔이지만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도를 닦으면 미타찰, 곧 극락에서 만날 수 있다는 불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공무도하가>가 보여 주는 '어쩌랴' 하는 태도, 곧 체념의 정서와는 달리

 '기다리겠노라'는 의지와 승화의 태도가 <제망매가>의 슬픔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비어져 나오는 슬픔과 절제된 슬픔 사이에서

<제망매가>는 향가라는 노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크게 보면 죽은 이를 기리는 노래이자 시이다.

한문 글쓰기의 전통에서 보면 이런 글에는 제문(祭文)3)과 묘지명이 있다.

이 중에서 누이를 기리는 대표적인 제문이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누이를 기리는 제문(祭妹徐妻文)>이라면,

묘지명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큰누님 박씨 묘지명(伯妹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다.

18세기 실학자로 서얼 지식인을 대표했던 문인 이덕무는 서른넷에 여섯 살 아래 누이동생의 죽음과 대면한다.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근무했던 서이수(徐理修, 1749~1802)에게 열여덟에 시집갔던 누이가 병4)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이덕무는 그 슬픈 누이를 회상하면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제문을 시작한다.

몹시도 예뻤던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업힐 때는 언제나 어깨를 잡고 손을 끌 땐 언제나 두 손을 잡던" 누이를 생각한다.

그리 곱고 살갑던 누이가 시집가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른 것이다. 슬픔은 운명의 날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6월 3일 그날을 어찌 잊겠니? 폭우가 쳐 사방이 어두웠지. 그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온 집안 식구가 굶었는데, 네가 알고 몹시도 불편해하더니 너의 병세가 그 때문에 악화되었는지? 네 아이를 그때 마침 돌려보냈는데 갑자기 네가 숨을 거두더구나.

늙으신 어버이는 흐느껴 울고 부모와 자식, 남겨진 모든 형제가 애고애고 세 번 곡을 하는데 그 소리 지극히도 애통하더구나.

이제 너는 영영 잠들었으니 애통한 이 소리도 못 들을 테지.

 

제문은 의례적인 글이고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을 하는 글이라 슬픔이 절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며 나오는 슬픔은 어찌할 수 없다.

혈육의 주검 앞에서 부모, 자식, 형제가 어우러져 곡을 하는 장면을 통해 슬픔을 드러내던 작자는 마무리 부분에서

 

"이제 너의 죽음을 겪고 보니 참으로 원통하고 참혹하구나.

너는 비록 편안할지 모르나 내가 죽은 뒤에 누가 곡을 해 줄까.

 아득하고 깜깜한 흙구덩이 속에 어찌 옥 같은 너를 묻을 수가 있을까.

아아, 슬프다! 상향(尙饗)5)."

 

이라고 하면서 슬픔을 직접 토로한다.

절제해야 하는 제문 밖으로 애통이 터져 나오는 형국이다. 죽음이 남은 이들에게 주는 슬픔과 아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벗으로 살았던 연암 박지원의 <큰누님 박씨 묘지명>이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이덕무가 제문을 쓰기 3년 전인 1771년, 서른다섯의 박지원은 마흔셋에 삶을 마감한 누이를 위해 묘지명을 쓴다.

하지만 법고창신(法古創新)6)의 글쓰기를 추구하였던 박지원은 묘지명의 관습적 형식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형식의 묘지명을 쓴다.

본래 묘지명은 돌에 새겨 무덤에 넣는 글이기 때문에 지극히 형식적이다.

죽은 이의 행적과 가족 관계, 그리고 죽은 이에 대한 칭송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

하지만 연암은 그런 형식으로는 누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 드러낼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죽은 누이의 신원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상여를 보내고 온 일을 서술한 뒤 대뜸 두 장면을 나란히 던진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마치 엊그제 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발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신랑의 말을 흉내 내 더듬거리며 점잖은 어투로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골이 나 울면서 분에다 먹을 섞고 침을 발라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자그만 오리 모양의 노리개와 금으로 만든 벌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나에게 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 찐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른다.

 

첫 장면은 누이가 시집가던 날 어린 자신이 떼를 쓰던 아스라한 옛 기억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어린 연암이 누이를 처음으로 잃던 장면이다. 어린 날의 상흔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장면이 영영 누이를 잃은 두 번째 장면, 누이의 상여가 떠나는 장면과 겹친다.

두 번의 상실이 슬픔을 배가시키는 형국이다. 그러나 연암은 슬픔을 앞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연암은 상여를 휩싼 먼 풍경을 누이의 쪽 찐 머리와 거울, 눈썹과 빗으로 읽으면서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

그러나 스물여덟 해를 사이에 둔 두 장면의 선명한 대비가 상실의 슬픔을 폭약처럼 장전하고 있다.

 

두 다리를 뻗고 통곡하는 자의 슬픔보다 그 곁에서 어금니를 물고 흐느끼는 자의 슬픔이 더 깊은 것처럼.

<공무도하가>에서 시작되어 <제망매가>에서 펼쳐진 죽음의 슬픔에 대한 표현은

연암 박지원의 <큰누님 박씨 묘지명>에 이르러 절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으리라.

 

 

인용작품

  • · 공무도하가
    작가 : 미상 / 갈래 : 고대 가요 / 연대 : 고대
  • · 애도문
    작가 : 안민학 / 갈래 : 한문 산문(애도문) / 연대 : 16세기
  • · 제망매가
    작가 : 월명사 / 갈래 : 향가 / 연대 : 신라 시대
  • · 누이를 기리는 제문
    작가 : 이덕무 / 갈래 : 한문 산문(제문) / 연대 : 18세기
  • · 큰누님 박씨 묘지명
    작가 : 박지원 / 갈래 : 한문 산문(묘지명) / 연대 : 18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