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나는 제사가 싫다'의 이하천

언러브드 2011. 8. 29. 20:56

‘100분 토론에서 이하천이 하고 싶었던 말’

내가 교양서로 접하게 된 책이 한 권 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저작인 ‘새로운 존재’라는 유명한 책이다.

이 책 가운데 특히 나의 관심을 끈 대목은 ‘옛 존재’(Old Being)와 ‘새로운 존재’(New Being)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었다. 2000년 전의 예수는 ‘옛 존재’와 ‘새로운 존재’의 관계에 대한 큰 틀을 인류에 제시하고 갔다는 것이 성서에 대한 틸리히의 해석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추구하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이 위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휼륭한 사회를 원하고 지향할 수 있는 희망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존재’가 되려면 비싼 댓가를 치러야 하며 ‘옛 존재’로 남으면 이익이 온다. 무엇보다 ‘옛 존재’는 편안하고 익숙하고 경제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틸리히에 의하면 정신병의 대부분이 이 ‘옛 존재’의 조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모든 정신병에서 도피성을 보았다. 그들의 특징은 낫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아픈 게 그들에게 현실을 피해 숨을 곳이었기 때문에 저 깊은 무의식에서는 자신들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수는 몸과 마음의 병이 다 같은 곳에서 온다고 보았다.

예수가 물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일어나서 걸어라."

이 말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이나 정신적인 병 모두 낫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사회는 매일매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고자 하는 기운을 꺾는 면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인의 맑은 마음에 매일매일 황사가 내려와 앉는다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 일생을 보내고 나면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잣대를 갖기 보다는 무엇이 이익이냐 아니냐라는 잣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부장제의 틀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 대신 무엇이 이익이냐 아니냐라는 잣대를 심어준 데 있다. 그 잘못을 받아들인 결과로 값비싼 댓가를 우리는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에서 ‘옛 존재’는 차원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어떤 심각한 사태에 대해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중심개념은 하느님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래야 삶의 단계마다 ‘새로운 존재’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이 말을 현대감각으로 말한다면 바로 인간의 정신을 언어를 도입해서 한 단계씩 격상시켜 나가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깔린 부정성과 긍정성▽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예수의 마음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게 많이 차지하고 있느냐 적게 차지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종교적인 언어를 싫어하기 때문에 종종 이 마음의 상태를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깔려 있는 ‘긍정성’이라고 표현한다. 온갖 부정성이 우리 마음 속에서 날뛰어도 결국 이 긍정성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이나 사회는 보다 폭넓고 보다 깊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갈 가능성이 높다.

우리사회는 지금 이 부정성과 긍정성의 비율이 대강 50대 50 정도라고 생각된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이 비율을 30 대 70을 이루어낸 사회를 말한다. 오바마가 미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은 바로 이 70%로 획득된 긍정성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토록 난리를 겪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긍정성, 즉 ‘새로운 존재’를 쟁취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림을 받고 있고 동시에 그 긍정성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서는 부정성 즉 ‘옛 존재’로부터 심리적 덮침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인간은 여성이나 남성이나 그 누구라도 약하고 상처받기 쉽다고 보았다. 단지 사람에 따라 강하게 보일 뿐이고 강하게 반응할 뿐이라는 얘기다.

▽우리사회의 심리적 현주소▽

긍정성과 부정성을 50 대 50으로 겨우 이루어낸 이런 사회의 특징은, 어떤 일이 일어나서 해결을 해나갈 때 긍정성으로 나갈 핵심을 지켜나가기 보다는 그 주변의 잡다한 부정성을 일으켜 세워서 핵심을 죽여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 말을 쉬운 말로 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것이다. 핵심은 아이들인데 아버지 조성민 밉다고 아이들에게 치명타를 날리려고 하고 있다.

조성민 친권사태를 겪으면서 과거의 상처로 어쩔 줄을 모르는 부정성과 생명의 본질인 긍정성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내어 최진실 조성민(글의 흐름상 ‘씨’ 자는 뺀다. 그것은 마치 엄앵란 신성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만들 것인가... 이것이 내가 이 논란에 뛰어든 핵심이다. 이 사태의 제 1원리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올바른 정신적 성장, 즉 균형감 있는 인격체로 길러질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돈? 이미 그 아이들은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으로부터 해방된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겪는 일과는 다른 차원에서 풀어가야 한다. 그래서 누리꾼들이 말하는 양육비를 줬느냐 아니냐, 아버지로서 부양임무를 했느냐 아니냐는 지극히 문제의 본질, 즉 핵심을 벗어난 관점이다. 그런데 자꾸만 그 문제를 부각시켜서 마치 아버지 조성민이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이 사태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돈 문제를 거론했을 뿐이다.

세밀하게 차별적으로 사려 깊게 해놓지 않은 법제도 때문에 난리를 겪고 있지만, 그 난리 속에서도 부당하게 한 인간을 짓밟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게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이 없다. 그 누구도 한사람에게 집단으로 달려들어 찢어죽일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조성민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그 길을 찾아가는 연령 대에 있다. 아직은 많이 미숙하고 또 성장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젊은이라는 것이다. 이 젊은이가 너무도 잘 있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허공에 뜨게 되었는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을 오히려 질타해야 할 것이다.

▽100분 토론에 참여한 의도▽

100분 토론에 참여한 의도는 바로 이 양측이 치열하게 양극으로 달려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심리적인 조절을 잘 해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최진실 아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느냐 아니냐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중 가장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입을 정신적 피해는 막아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피해는 아이들의 마음의 성장을 막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최진실 쪽은 천사이고 조성민은 악마라는 현재의 구도를 어떻게 하든 조정을 해내기 위한 첫 단계로 최진실 쪽에도 하자가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것은 천사로 집약되는 부분을 우선 조정해 주어야 다음 단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천사로만 위장이 되어 있으면 더 이상 길이 없다. 한쪽은 잘못이 하나도 없는 불쌍한 천사인데 당연히 그 천사를 괴롭히는 것은 악마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그게 맞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천사인 사람이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심리 속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을 조절해 내면서 이런 판단도 하고 저런 판단도 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할 발언은 그 최진실 집안도 아주 탁월하게 잘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육권은 외할머니가 갖는 게 아버지 조성민이 갖는 것보다 더 안심이 된다. 한편 외할머니와 아이들은 이미 세대차가 너무 나고 또 이런저런 상황을 보았을 때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돕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럼 누가 그 부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구도에서 보면 아버지 조성민의 역할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버지 조성민에게도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막말이라고 폄하되는 그 말을 시작했다. 안 그러면 길이 뚫려지지 않는다. 불쌍하고 억울한 천사를 껴안고 있으면 다른 한쪽을 파괴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을 심리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 발언으로 시작을 한 것으로 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발언가지고 대혼란이 벌어졌다. 언론에 뜬 이하천 막말논란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그것은 파괴하기 위해 그 말을 썼을 때 쓸 수 있다. 나는 단지 파괴하기 위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 윈윈의 길이 없으면 말을 하지 않는다. 다같이 윈윈으로 나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파괴를 했기 때문에 당당했다. 그래서 언론에서도 그것은 상처치유로 들어가기 위한 치유방책으로 받아들여야 적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고 아이들 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입는 마음의 상처는 스스로 조절하라는 것이다. 어른은 그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머니도 없는 마당에 아버지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또 그 아버지가 아이들과의 관계를 원하니 너무도 감사한 일이라는 것이다. 재산권은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신탁관리 되는 쪽으로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얼마든지 합리적인 처리가 가능한 그 재산권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아이들 부분을 놓치면서 더군다나 그 중요한 부분을 파괴를 하고 있어서 그러면 안 된다고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통장이 지급정지가 된 것은 친권자가 정해질 때까지 법에 따라 은행이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이지 조성민이 움직여서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친권자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돈을 인출해 가나? 그런 확인되지 않는 루머로 아버지 조성민을 너무 악랄한 사람으로 몰지 말고 그 사람에게도 있을 장점을 부각시켜 훌륭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 사회와 주변 인물들이 서로서로 심리조절을 통해서 도와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안 그러면 서로 붙들고 우린 슬프다고 우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올바른 길로 들어서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양측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 패배감, 억울함... 같은 감정들을 심리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다 잘했고 너는 다 잘못 했다로 나가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마음에서 인간의 증오에 휩싸인 이기심을 본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기심의 수위조절이 불가피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미움에 휩싸인 이기심이 100%라면 그것을 조절해서 50% 이하로 낮추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인정할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싶다. 외가 측은 할머니는 아무리 아이를 사랑해도 할머니이지 절대로 부모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자꾸 반대로 가려고 하니 막아서고 나섰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분 토론에서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려고 했다. 그것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이 되고 있는 이 아픔을 해결해 나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문제해결에 관심이 있었고 일부 패널들은 그 부분을 터치를 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거기서 잠간 충돌을 한 것뿐이다. 나는 어떻게 하든 일을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지 다른 것에는 관심자체가 없다. 이 일을 해결하는데 어른들이 입을 상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의 영혼이 불에 타게 생겼는데 어른들 상처가 문제인가? 나는 언론이 그런 일도 해주는 것이 공적기관의 사회적 임무에 들어간다고 보는 입장이다. 무조건 감싸고 추켜세우고 누가 다칠까봐 쉬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 상 특수한 개인의 가정사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에 부담이 따라 법적이고 일반적인 문제로만 100분 토론을 진행시킨 것 같다.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았다고 하여 안타깝기는 해도 누구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식으로 기사가 나간 것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최진실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

한 사람이 죽었다.

국민들은 그 죽음에 대해 너무도 가슴 아파한다.

고인의 죽음 앞에서... 진정 아이들을 위한다면 외가와 아버지 조성민과의 화해와 용서가 있기를... 그 아픔, 즉 국민들의 아픔과 최진실 측과 조성민의 아픔이 어느 정도 해결되기를...

그래서 지금은 자기 자신들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비난하며 싸울 때가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부각시켜 건설할 때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자꾸 언론을 향해서 이 말하고 저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며 얼마나 악의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도 언론도 양측이 심리조절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그게 바로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 이런 시각은 건축공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아이들을 위해서 아버지 조성민을 넣고 집을 짓는 것이 낫겠나, 아니면 조성민을 빼고 집을 짓는 것이 더 낫겠나? 나는 아버지 조성민을 넣고 집을 짓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이 인문학적 관점이기도 하다.

양육권은 외할머니가 갖고 돈 관리는 신탁제도를 도입하고 아버지 조성민은 아버지 노릇 즉 정신적 성장을 위한 아버지 역할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아버지 조성민으로 하여금 2,30년 동안 훌륭한 아버지로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되었을 때 최진실의 영혼도 편안히 잠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

▽진정한 모성이란?▽

아버지 조성민과 아이들과의 건강한 관계설정을 올바로 시켜놔야 아이들의 영혼에 상처가 가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도 없는데 아버지마저 뺏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할머니는 할머니일 뿐이다. 부모가 없는 허전함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성민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면 아이들의 영혼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돈보다도 더 중요한 아이들의 인격형성에 어떤 치명적 장애가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현 단계 이 사회의 진정한 모성이 취할 태도는 아이들과 외가에 대한 배려와 병행하여 아버지에 대한 배려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네티즌들도 진정 최진실을 생각한다면 아이들을 위해서 너무 단순하게 화만 낼 것이 아니라 자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권반대카페에 부탁을▽

마지막으로 ‘한 부모 진실모임’과 ‘조성민 친권반대카페’ 여러분들의 역사적인 움직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기에 친권에 숨어있는 갖가지 함정을 우리사회가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에 따라 법제도에도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계속 그런 부분에 힘써주면 감사하겠다. 그러나 이 사태는 최진실, 조성민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봐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케이스보다는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사태에 한해서는 여러분들의 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아이들을 위해 조금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말하자면 감정적 대결양상 보다 아이들에게 아버지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아이들의 영혼에 올가미를 씌우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심사숙고해 달라는 것이다. 조성민이 했던 말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는 마음뿐’이라는 그 마음을 인정해야 이 문제는 윈윈으로 풀린다는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소설가 이하천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