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고시원을 찾는 사람들(르포기사)

언러브드 2013. 7. 4. 10:57

입력 : 2013.07.03 16:32 | 수정 : 2013.07.03 16:56

지난해 말 서울 관악구 신림동 N 고시원에서 40대 남성이 홀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평소 알코올 중독과 심장병을 앓으며 매일 술을 마시던 터였다.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고교 중퇴 이후 서울 금천구와 경기도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야간 업소 무명가수로 살아가던 그가 맞은 마지막 장소는 월 임대료 15만원짜리 방이었다.

고시원 맞은편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장은 "N 고시원은 일용직 근로자를 비롯해 조선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근근이 살아가고 있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일용직 노동자가 서대문 우체국 부근 고시촌에서 TV를 있다. / 조선일보 DB
 한 일용직 노동자가 서대문 우체국 부근 고시촌에서 TV를 있다. / 조선일보 DB

고시원은 이제 과거 사법고시와 같은 시험 준비용 공간에서 진화해 다양한 주거형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2000년대 전후 주머니 사정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대학가 중심으로 늘어난 고시원은 이제 일반 직장인부터 외국인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까지 외부 유입인구를 중심으로 주거의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유는 높아진 주거비 부담과 다양해진 고시원의 가격대 덕분이다.

전남 여수 출신으로 제대 후 최근 복학한 이화식(24·한양대 피아노학)씨는 "군대 가기 전인 2010년 말에는 월 40만원짜리 월세를 흔히 찾아볼 수 있었는데, 제대 후 보니 최소 월 50만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여기에 예전과 달리 보증금도 더해진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다. / 조선일보 DB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다. / 조선일보 DB

이런 변화 때문에 고시원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명칭도 바뀌면서 단순 고시원이 아닌, 고시텔, 원룸텔, 레지던스 식으로 형태를 바꾸고 있다. 잠을 자는 공간 외에 욕실·화장실을 공동으로 이용하던 수준에서, 지금은 방마다 욕실을 겸비한 깨끗한 시설의 고시원들도 늘어났다. 2000년대 초중반 20만~30만원 선이었던 고시원 월 임대료도 지금은 지역에 따라 10만원 선에서 비싼 곳은 60만원을 훌쩍 넘을 정도로 다양화했다.


소방방재청에 등록된 자료를 보면 현재 전국 고시원수는 1만1232개. 2009년 6126개에서 2배 가까이 늘어난 상태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이 6157개로 가장 많다. 서울도 2009년 3837개였던 고시원 수가 4년새 2000개 이상 늘어났다.
2000년대를 전후로 지어진 고시원. 복도가 좁고 생활 시설이 열악한 편으로 월 임대료는 20~30만원 선이다. / 변기성 기자
 2000년대를 전후로 지어진 고시원. 복도가 좁고 생활 시설이 열악한 편으로 월 임대료는 20~30만원 선이다. / 변기성 기자

가격폭이 넓어지고, 용도도 다변화되다 보니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대학생과 유학생 중심에서 일반 직장인,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추가되는 상황이다.

서울 혜화동 인근 H고시원에 사는 50대 조선족 여성은 대학가 주변 호프집에서 일하며 월세 25만원짜리 고시원에서 3년째 생활하고 있다. 그는 "오후 4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하기 때문에 잠만 자는 공간만 있으면 돼 고시원으로 왔다"며 "전기료나 가스비, 수돗세처럼 자잘한 비용이 들지 않아 돈을 모으고 잠만 자는 (나 같은) 입장에서는 오히려 낫다"고 말했다.

고시원에서는 가스비, 전기료, 수돗세 비용이 들지 않고 냉·난방기가 설치돼 있어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월세만 일시불로 내면 되는 등 이용에도 장점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리모델링을 한 서울 성동구의 E고시원. 방마다 화장실과 함께 개별 냉난방기를 설치함은 물론 전보다 복도도 넓혔다. / 변기성 기자
 지난해 리모델링을 한 서울 성동구의 E고시원. 방마다 화장실과 함께 개별 냉난방기를 설치함은 물론 전보다 복도도 넓혔다. / 변기성 기자

다만 과거 화재사고 등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최근 고시원에서도 각각 소화기를 비치하고 방별로 비밀번호 잠금, CCTV 등을 설치하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실내 공사를 보강하고 있다. 서울 신촌 대학가 앞 인근 E고시원은 지난해 8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최신 시설로 리모델링했다. 공용 화장실을 없애고 방마다 화장실을 설치하고 중앙냉난방을 개별 냉난방으로 바꾸고 좁고 복잡해 미로 같던 복도를 폭도 넓히면서 40실을 17실로 줄였다. 대신 과거 25~28만원 수준이었던 월세를 63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E 고시원 사장은 "과거에는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외국인 유학생들이 주로 머물렀지만, 시설을 바꾸고서 나서는 일반 직장인들도 이곳을 많이 이용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