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맷값사건 - '또라이 도련님' 최철원이 일깨운 것

언러브드 2010. 12. 10. 03:19

 

SK가(家)의 2세인 최철원에 의해 벌어진 노동자 유씨에 대한 '맷값' 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또라이 재벌 2세의 야만적 행동에 분노하고 있다.

(최철원 맷값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는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테니 생략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들의 분노는 사람을 때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폭력, 그것도 잔인한 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루에도 넘쳐흐른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공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골목에서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때리고 맞는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때렸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만도 아니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때리는 일 역시 말하는 것 자체가 진부할 정도로 일상적인 사건이다.

나이가 어린 놈이 나이가 많은 사람을 때렸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만도 아니다.

다소 패륜적이기는 하지만 지하철에서도 가끔 자리를 가지고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시비가 붙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질에 대해 시작부터 '값'을 지불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니, 그냥 때린 것도 아니고 값을 지불했다는 것에 더 분노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찌 보면 돈을 주지 않고 때리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은가?

여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는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하는 사고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이고 돈이면 환장하는 사회라고 하지만 돈을 주고 사람을 때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반대한다는 것이다.

학생들 역시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 혹은 사람과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은 절대 돈으로 환산되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닳고 닳은 낡은 '도덕적 말'에 자본주의의 진실 혹은 허구가 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체제이다. 질적으로 아무리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돈'을 통해서 매개되고 교환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실체는 '폭력'이라는 말이 나온다. 질적인 모든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인 것으로 환산하기 때문이다.

이 돈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 앞에서는 사랑이고 명예고 뭐든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다 값어치가 매겨져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이지만 단 하나는 절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순간 자본주의의 가정 전체가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격'이며 인격을 총체적으로 보증하고 있는 인신(人身), 즉 인간의 몸이다.

추상적으로 우리가 팔거나 양도할 수 없는 '인간' 자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몸'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인간의 몸은 팔거나 양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기 의지에 따른 사적인 계약관계라는 가상위에 성립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계약을 통해 팔 수 있는 것은 노동이라는 '행위 능력'과 그 '시간'이지 결코 자기 자신이지 않다.

구직하거나 구인할 때 '노동계약서'를 쓰면서 노동의 종류와 형태를 명시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팔아버리는 순간부터 계약은 계약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체포기각서라던가 노예계약은 애초부터 무효가 된다.

비인간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가장 위험한 체제부정의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굶어죽는 것도 개인의 책임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노동자가 굶어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노동자와 맺은 계약관계에 들어있지 않는 한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최철원 맷값 사건은 이 근대 자본주의의 '전제' 혹은 '가정'을 가볍게 비웃고 있다.

정말 당신들이 나에게 파는 것이 '특정한 시간'이며 '특정한 노동 능력'이지 인격 그 자체는 아니라고?

내가 그 대답을 알루미늄 야구 방방이로 알려주마. 이 '또라이 도련님'이 보여주는 것은 그 개인의 파괴적인 인성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이 가상이 얼마나 기만이고 허구인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두 독립적인 인격체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계약 바깥의 일탈적이고 야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야만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약간 멋을 부려서 말한다면 자본주의에서 야만은 안으로 접혀 들어간 바깥이다.

때마침 한국에서 비행기로 6시간 떨어진 말레이시아에서도 신체형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BBC에서 말레이시아의 태형에 대한 뉴스를 보내왔다.

말레이시아에는 여전히 태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태형이 전근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 태형이 자본주의를 이 나라들에 이식한 영국 식민주의에 의해 소개되고 법으로 정당화되었다는 것은 간과한다.

그리고 이 태형은 지금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글로벌한 것이 되어 '세계화'를 규율하는 처벌이 되었다.

시속 160킬로미터로 날아와서 살점을 도려내고 평생의 불구와 흉터로 남는 이 처벌의 가장 많은 희생자들이 바로 이주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과거'가 '탈'근대적인 미래를 규율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본주의의 이전과 바깥은 근대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말려들어가 가장 근대적인 규율수단으로 활용된다.

노예제와 태형, 그리고 어린이 노동 등 모든 야만적인 착취는 자본주의 안에서 빚어진 일이지 결코 자본주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거기 어디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있는가? 이 자본주의의 '전제'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오히려 '몸-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남에게 합법적으로 박탈당한 노예-농노들의 삶뿐이지 않는가?

사실 많은 직장인들이 이 사건에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의 얼굴을, 매맞은 몸을 이 50대 노동자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처럼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영원한 안주거리야말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비굴했는가를,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 자존심의 바닥까지 다 내팽겨쳐야 했는가를 술자리에서 토로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난주 <개그콘서트>의 '두분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부장님은 저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시며 그 전날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하더라도 과장님이 '오늘은 자장면을 먹지'하면 군소리 없이 '예'라고 말해야하지 않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온 몸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파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인신(人身)이라는 것을.

다시 눈을 주위로 돌려보자. 정말 우리 사회에 '노동계약'이라는 것이 지켜지고 있는가?

계약직 운동코치는 '직무 설명'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운동장 휴지줍기부터 시작하여 학생들 생활지도까지 책임져야한다.

은행의 '빠른 창구'에 있는 비정규직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지말라고 금지된 금융상품 판매를 해야 한다.

대학의 석박사 조교들은 아예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돈이 입금되는 통장을 지도교수에게 통째로 맡겨야한다. 지자체의 하급 공무원들은 '사모님' 장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련님'이나 '아가씨' 과외 수발까지 들어야한다.

때마침 비정규직 노조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정규직화'를 부르짖는 울산에서 교육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야만적인 소식이 또 들려왔다. 대체인력으로 '전문계 고등학생'들이 투입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이번 PISA(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OECD 학업성취도 국제 비교 연구) 결과에서 상하이가 전세계에서 일등한 것이 화젯거리가 되면서 교육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상하이의 성공비결교사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들이 교육에 몰려들고 일반고를 가리지 않고 수준별 학습을 하며 영재교육을 한는 탓이라며 우리도 그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긴다.

그 잘난 '교육'에서 이 '전문계 고등학생'들은 당연히 셈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대체가능한 일회용 노동력일 뿐이다. 잘난 '교육'은 오로지 잘난 '도련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뿐이다.

도련님는 학생이고, 학생이어야 하지만, 마당쇠와 언년이는 학생일 필요가 없고 학생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착각을 돌아보고 우리가 왜 분노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노동계약이 근대적인 노동계약이라고 애써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철원 맷값 사건은 불현 듯 우리를 환기시키고 있다.
정말 우리가 맺고 있는 것이 노동계약인가? 우리의 신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능력만을 파는 것이라는 이 노동계약은 정말인가?
아니면 우리의 몸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넘긴 인신계약인가?

혹 노동계약이란 사실은 인신계약인 것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인 것은 아닌가? 아니, 우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노동계약은 인신계약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으며, 관리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사람의 몸을 사고 파는, 구속하고 통제하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최철원 매질 사건은 우리에게 말한다. 사람의 인격과 신체에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사고팔며, 때로는 마음대로 때리고 처분하는 전근대적인 신분제도,

즉 인신구속이라는 야만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동력이라고.

이런 점에서 유 씨는 한 철딱서니 없는 야만적 또라이의 희생자인 것이 아니다.

그의 몸은 우리 시대의 야만이 아닌, 야만으로서의 우리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노동자 유 씨야말로 자신의 몸으로 야만의 시대를 폭로한 시대의 증언자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와 야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시대의 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추어진 야만을 들추어내는 심층보도-르포일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남의 이야기이다. 못살고 탈락한 남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야만으로서의 시대에서 우리가 그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맞아 시퍼렇게 멍든 몸과 애써 외면하던 나의 상처가 공명(共鳴)한다.

시대의 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야만의 시대를 견디고 있음에.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