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산행 팁(Tip)

[스크랩] 네팔 트레킹-안나푸르나 라운드

언러브드 2009. 4. 28. 19:52
         ○네팔 트레킹-안나푸르나 라운드○
 
 
 
        문명권에서 오래 전 잃어버린 본성의 길
해발 5,000m대 토롱라 고개를 넘으며 생각하게 된 인생길
 

안나푸르나는 곡식과 풍요라는 뜻을 가진 안나와 푸르나의 합성어이다. 농업을 관장하는 힌두교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도 대륙과 티베트 고원을 동서로 가르고 흐르는 네팔 히말라야의 중심선에 안나푸르나의 제1봉(8,091m)을 비롯, 제2봉(7,937m) 제3봉(7,855m) 제4봉(7,525m) 남봉(7,219m)과, 동서 외곽으로 마나슬루(8,156m) 다울라기리(8,167m)가 서로 연접하고 중첩되어 거대한 하나의 산군을 이루고 있다. 일찍부터 트레킹 코스가 발달하고, 또한 세계인으로부터 특별한 인기를 누리는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안나푸르나 산군을 한 바퀴 크게 도는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코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은 토롱라(Thorungla·5,416m))다. 야카와캉(Yakawakang·6,482m)과 카퉁캉(Kathungkhang·6,484m) 사이로 넘어가는 이 고갯길은 서쪽 사면이 워낙 경사가 급해 보통사람들은 하루만에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가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일반적으로 시계 반대방향을 따라 마낭, 군상, 토롱패티를 지나 묵티나스로 내려간다.

그동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토롱라를 넘어보지 못한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거나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갈 때마다 매번 좀솜 혹은 묵티나스에서 발걸음을 멈춰야했던 것이다. 안나푸르나 일주코스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려면 보통 두 주일 이상이 걸린다.


▲ 묵타나스에서 좀솜으로 향하는 하산 길은 정상을 정복하면서 써버린 소진된 체력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게의 압력 속에 고통을 발등에 실은 듯 아프고 고달팠다.

 

불멸의 초월적인 세계처럼 보이는 히말출리

일주코스 트레킹은 베시사하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차를 대절한다면 람중(Lamjung)의 중심지인 베시사하르(besisahar)를 지나 쿠디(Khudi)까지 곧장 들어갈 수 있다. 비포장 길이지만 경사가 거의 없고 평탄해서 차에 흔들리면서 마르샹디 강을 따라가는 경험도 나쁘진 않다. 카트만두에서 출발해 베시사하르를 지나 쿠디까진 6시간 이상 걸린다.

첫날밤을 쿠디에서 잔다. 해발 800m로 카트만두보다 오히려 낮은 곳인데, 안나푸르나 빙하가 녹은 물길, 마르샹디 강이 휘돌아가기 때문일까, 저물 녘 차에서 내려서자 섬뜩한 한기가 몰려든다. 구룽족들이 주로 모여 사는 쿠디 마을은 마르샹디 위에 걸린 출렁다리를 중심으로 강 양쪽에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간간이 빗발이 뿌리는 안개구름 너머로 안나푸르나가 제 속살을 은밀히 감추고 있는 게 창 너머로 넘어다 보인다. 여간해서 비가 오지 않는 2월인데 계속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게 수상하다. 해발고도가 높아진 안나푸르나의 내경(內景)엔 눈이 내려 쌓이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일기예보에 이번 주 계속 날씨 안 좋데요.”
현지 안내자의 말도 마음에 걸린다.
이튿날,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는 여전히 좋지 않다. 쿠디 마을 뒤로 올라서자 강을 따라 휘돌아가는 평평한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동차도 다닐 만큼 넓고 편안해 뵈는 흙길이다. 오랜만에 텅 빈 흙길을 밟고 가니 단번에 문명의 두건을 벗은 듯 마음이 쾌적해진다. 30분 정도 걸어가자 불레불레 마을이 나온다. ‘불레불레’는 우리말로 하면 ‘보글보글’ 정도의 뜻이다.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다.

▲ (왼쪽) 당나귀는 최고 60kg까지 물건을 짊어지고 홀로 걷기도 힘든 산길을 앞서 걸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다. (오른쪽) 히말라야에서 닭은 트레커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여 찾는 보양식 음식이다. 그들이 더 높은 곳에 이를수록 닭의 값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차 한 잔을 마시는데 해가 비친다. 체로 받혀낸 것처럼 맑은 햇빛이다. 아직 하늘 한 켠은 구름장으로 덮여 있지만 햇빛이 비쳐주니 새 세상을 얻은 기분이다. 출렁다리 하나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마르샹디 강 위에 걸렸는데, 너무 예쁘다. 한 떼의 당나귀들이 나보다 앞서 출렁다리를 건너간다. 

“저기 좀 보세요!”
동행자 한 사람이 전방을 가리킨다. 하아, 하고 유리창을 닦기 위해 입김을 불 때 같은 소리가 저절로 내 입에서 나온다. 잊을 수 없었던 예전의 연인을 다시 만난 듯이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바로 히말출리(Himal Chuli·7,893m)와 가디출리(Ngadi Chuli·7,835m)의 중첩된 정수리가 구름 위로 날렵하게 솟아올라 떠 있다. 그것은 마치 불멸의 초월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길은 가디를 지날 때까지 평탄하다. 가디(Ngadi·920m)에서 점심을 먹고 떠났더니 곧 마르샹디 강과 가디 강이 합쳐지는 지점이 나오고, 한참 후 또 한 번 출렁다리를 건넜더니 비로소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바훈단다(Bahundanda·1,300m)까진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길.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처럼 축적된 계단식 논밭이 좌우에서 도열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특히 람파다 마을에서 바훈단다까진 아주 경사가 급하다.

‘브라만들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의 바훈단다는 이 근처에선 가장 큰 마을답게 호텔과 상점도 많고 또 학교도 있다. 네팔의 학교는 일반적으로 초등학교와 중등과정이 함께 붙어 있다. 마을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찬드루다야 학교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과정이 5년, 중학교 2년, 고등학교 과정이 3년이다. 때마침 유서 깊은 학교의 개교 50주년을 맞아 마을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다. 5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겸해 고등학교 과정을 5년제로 늘려 외국의 학제와 맞추려는 캠페인을 함께 벌인다는 것이다.

외부 손님이 많아 간신히 방을 구하고 학교에 들렀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운동장을 빼곡이 채우고 앉아 있다. 군수를 비롯하여 네팔의 국민시인이라고 불리는 마덥 프라샷 기미레씨가 연단의 중앙에 앉아있는데, 반백의 노시인 풍모가 히말라야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기미레씨는 네팔의 초중고 교과서는 물론 대학교재에도 그의 작품이 실려 있어 계층과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네팔인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다. 내가 연단으로 올라가 한국작가라고 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노시인은 반색을 하고 내 손을 잡으면서 놀빛에 물들기 시작한 맞은편의 설산을 가리킨다.

“보세요. 네팔, 저렇게 아름답습니다.”
노시인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다.
현재 찬드루다야 학교는 약 30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어떤 학생들은 두 시간이 훨씬 넘는 험한 비탈길을 걸어 등교한다. 칠판 하나뿐인 어두컴컴한 흙벽과 양철지붕 아래의 교실에서 공부하지만 그들은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발시대의 우리가 그랬듯이 교육이 수직이동의 지름길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기미레 시인도 이 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에 카트만두로부터 먼 길을 걸어 기꺼이 개교 기념행사에 참가했다고 한다. 노시인이 자꾸 연단 아래까지 따라 내려오며 당신의 조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지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히말라야 설산은 그것 자체로 목숨이고 죽음’

날씨는 계속 흐렸다 맑았다 오락가락하더니 사흘쯤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햇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해발고도는 서서히 높아진다. 둘째 날은 참제(Chamje·1,430m), 셋째날 밤은 다라파니(Dharapani·1,860m), 넷째날은 티망(Timang·2,270m)에서 짐을 푼다. 비로부터 눈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다라파니를 지나면서부터는 무리해 걸을 수가 없다. 이대로 눈이 계속 온다면 토롱라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올는지도 모른다.

“토롱라에 눈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대요.”
전문 산악가이드도 자신이 없는 눈치이다. 넘어가지 못한다면 걸어 올라간 그 길을 되돌아 내려와야겠지만, 고개를 꼭 넘어가야 무엇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히말라야에선 ‘목표’라는 개념은 쉽게 무화(無化)된다. 문명권에선 자동차가 길을 열지만 히말라야에선 신께서 모든 길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비록 고산등반은 아닐지라도 신생아처럼 순정적인 마음으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을 넘어가는 물길이 없고 물길을 건너가는 산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우주적 관점으로 볼 때 채 티끌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일진대, 저 거대한 만년빙하가 둘러친 히말라야에선 신에게 귀의하려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샹디 강은 정말 역동적이다. 길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흐른다. 어떤 땐 강과 눈높이가 가까워지고, 또 걷다보면 어떤 때 마르샹디는 까마득한 수백 미터 절벽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석회질이 조금 섞였지만 절벽 아래의 강물은 진녹색이다. 수백 미터 폭포가 강물 위로 직접 낙하하는 장관도 하루에 몇 번씩 볼 수 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지만 문명의 폭력성이 끌어올리는 욕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왔으니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나는 때로는 빗속을, 때로는 눈발 속을 꿈인 듯 생시인 듯 걷는다. 설봉을 인 채 거의 직벽으로 솟아올라간 젊은 히말라야의 정수리들과 벼랑 사이로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 숲과 격정적으로 휘돌아가는 마르샹디 강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내경들이 속속들이 내 감수성의 모니터에 생생히 들어와 박힌다.

욕망의 대폭발을 세계사적으로 가장 극렬하게 경험하고 있는 조국의 모든 것들은 다 전생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천루처럼 드높은 릴리단다 마을에서 마신 블랙티 맛과 아름다운 카나니온 마을의 푸른 보리밭, 수백 미터가 넘는 시양제폭포, 암벽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뚫린 벼랑끝 길을 방울소리 부드럽게 내면서 줄지어 흐르던 당나귀 대열과 마부들의 발소리, 그리고 그 협곡과 협곡으로 띠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의 모든 풍경이 뜨겁게 본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자유로운 내 영혼 속으로 달려 들어온다.

‘나의 샹그리라, 마낭’ 아름다운 강변마을 탈(Tal·1,700m) 어귀의 현판엔 그렇게 쓰여 있다. 탈 마을부터 구룽족들이 많이 사는 람중 지역이 끝나고 티벳문화가 물씬 풍기는 마낭 지역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티벳 불교의 상징인 룽다(지붕 위나 대문 앞에 거는 깃발)가 부쩍 많이 보인다.

한낮에도 바람 끝이 차다. 해발고도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원래 네 번째 밤을 차메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자주 비나 눈이 오는 바람에 티망에서 짐을 푼다. 눈길이라 그만큼 체력소모가 크다. 요기를 하고 누에고치처럼 침낭 속에 몸을 오그리고 뉘었더니, 멀고먼 우주 바깥까지 밀려나온 기분이다. 꿈에, 내가 걸어온 신의 길들이 사방으로 흘러다닌다.

내일도 계속 눈이 내린다면 이쪽 지역의 중심마을 마낭까지 가는 것조차 불가능할는지 모른다. 옆방에서 누군가 돌아눕는 소리, 낮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에선 누구든 가엾은 존재의 본성를 만날 수 있다. 아마도 그 누군가가, 허겁지겁 욕망을 쫓아오느라 생겨난 생(生)의 물집들을 지금 옆방에서 터트리고 있는 모양이다. 별은 오늘밤에도 보이지 않는다.

해발 3,540m의 마낭은 큰 마을이다. 근처에 비행장도 있다. 그러나 경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엔 눈이 1m 이상 쌓여 있다. 앞서간 많은 여행객들이 눈 때문에 토롱라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 내려오느라 야단이다. 나 또한 쿠디에서 마낭까지 일 주일이면 올 수 있는 길을 열흘 걸려 오지 않았던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내린 피상(Pisang·3,200m)에선 이틀이나 오도가도 못하고 한 로지에 부초해 있다가 겨우 떠났으며, 피상-마낭 사이의 삼나무숲 사잇길인 불과 십 리도 안 되는 거리를 한나절 넘게 걸어왔을 정도이다.

다행히 날씨가 하루 종일 맑다. 마낭을 떠나 야크카르카(Yak Kharka·4,018m)까지 걷는 길은 그야말로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눈의 보금자리’이다. 서울에서 가져간 선글라스로는 눈에 반사되는 강렬한 빛을 모두 차단시킬 수 없어 좀더 자외선 차단 강도가 높은 선글라스를 동행자에 빌려 바꿔간다. 해발 4,000m가 가까워 바람 끝이 찬데도 한낮엔 눈의 복사열이 온몸을 찌르고 들어와 사우나탕 속에 있는 느낌이다.

군상(Gunsang·3,900m)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먹는다. 눈 때문에 토롱라를 끝내 넘어가지 못한 트레커들이 계속 엇갈려 지나간다. 군상은 아침부터 햇빛 속에서 자태를 뽐내던 안나푸르나 3봉(7,155m)과 활대같이 휘어진 능선으로 연결된 강가푸르나(Gangapurna·7454m)가 가장 잘 보이는 마을이다. 포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강가푸르나 북쪽 사면에 쌓였던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풍처럼 밀려내려오고 있다.

설연이 안개처럼 휘몰아친다. 7,000m가 넘는 산의 전신이 거의 말쑥하게 드러나 보이는 지점이다. 푸르스름한 빙하의 발톱까지 낱낱이 보인다. 어찌 안나푸르나와 강가푸르나뿐이겠는가. 돌아보면 멀리 8,000m가 넘는 마나슬루의 눈그림자도 보이는 것 같고, 또 고개를 돌리면 하늘 끝까지 채우고 뻗어나간 수많은 설산의 스카이라인이 손금을 보는 것처럼 가깝고 또렷하다. 며칠째 계속 눈이 내려 쌓여 흰 광채는 낮은 곳 높은 곳을 가리지 않고 천지간에 가득한데, 부드러운 눈의 그림자 사이로 오로지 휘돌아가는 마르샹디 강의 푸른 빛만 본래의 제 고유한 색깔을 뽐낼 뿐이다.

‘불 켜지듯이 환히 눈도 부셔라 흰 눈이여 / 신의 지문이 찍혔을까’로 시작해 ‘부디 한 바다의 밀물을 담아 / 무거운 수심(水深)으로 다져져라 빌기에 / 목숨으로 제물을 삼았거니’로 절정을 이루는 김남조 선생의 시 ‘설화’가 절로 입속에서 맴돈다. 히말라야의 설산들은 그것 자체로 목숨이고 죽음이다. 그곳엔 삶과 죽음, 문명과 반문명의 경계도 없으며, 시간의 눈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티끌 하나 없이 고도의 청정한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색계(色界)에 도달한 느낌이다. 히말라야를 십 년 넘게 자주 다녔으면서도 이렇게 압도적이고 강렬한 설경은 처음이다.

 

 

심연과 같이 깊은 ‘사원’에 와 있는 느낌

다시 강가푸르나를 등지고 걷는다. 열흘 이상 걸어온 데다가 사방의 흰 광채 때문일까, 무엇에 잔뜩 취한 것처럼 걷는 발걸음이 도무지 두서가 없다. 비탈길을 한참 내려와 출렁다리를 건넌다. 이상한 것은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벼랑 아래 위태로운 사면에도 가끔 살아 있는 그 무엇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가도 없고 마을로 통하는 길이 아니라서 당나귀나 야크가 걸어갔다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날렵한 짐승의 발자국도 아니다.

“짐승의 발자국도 아니잖아?”
“설인인가 보지. 예티(Yeti) 발자국.”
동행자의 대답이 예쁘다. 히말라야산맥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설원에 사는 걸로 알려진 예티의 존재는 산사람들에겐 절대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경계가 없고, 그 어떤 번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히말라야의 이상향인 샹그릴라와 함께 히말라야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신성(神性)이자 영원한 꿈이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그 신성과 꿈을 잃지 않아 문명권의 우리네보다 더 순정적이고 그늘이 없는 따뜻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크카르카 윗마을에서 쓰러져 눕는다. 해발 4,000m가 넘었고 트레킹을 시작한 지 열하루째가 되는 밤이다. 창 너머 내다보니 수천 수만의 별들이 우주 밖의 현인들처럼 반짝이고 있다. 어떤 별은 조금 붉고 어떤 별은 조금 푸르고 어떤 별은 하얗다. 지구에서의 거리에 따라 별의 빛깔이 다르다는 걸 책에서 잃었지만, 정말 별 하나 하나가 제 몫의 색깔을 뽐내는 건 처음 본다. 또 어떤 별들은 윤동주의 시구처럼 ‘바람에 스치우며’ 떨고 있다.

다시 새벽이다. ‘설날’이어서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북어포와 과일을 로지 뜰 눈의 제단 위에 간단히 차려놓고 차례를 올린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승에 계시지 않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멀고 먼 이곳 해발 4,000m 넘는 설산까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실 터이다.

▲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주를 위해 ‘포터’의 역할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면 그들은 네팔의 주식인 달밧(Daal Bhat)을 먹으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상차림은 초라해도 히말라야를 보세요, 어머니.”
눈밭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토롱라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히말라야의 산신령과 아버지 어머니의 혼백이 협상하기에 달렸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든다. 아버지 어머니는 살아생전부터 자식사랑에서 이미 선적(禪的)인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능히 히말라야 신들과도 맞장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토롱패티 하이캠프에서 잘 예정이다. 하이캠프는 해발 4,450m의 토롱패디에서 두 시간 정도 아주 가파른 사면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관건이다. 4,800여m의 하이캠프에서 고소증을 느낄 것인가 하는 것도 위험한 변수 중 하나이다. 길이라고 해야 앞서간 몇몇 사람들의 발자국뿐이다. 토롱패티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은 45도 이상의 경사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길로서 눈이 없을 때도 종종 산사태가 난다고 한다.

“산사태 눈사태도 막아주시고요….”
겨우 북어포를 올린 차례상 앞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다. 아버지 어머니의 혼백은 묵묵부답이다. 그래도 나는 서울에서보다 당신들과 훨씬 가깝게 다가서 있다고 느낀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왜 나는 자꾸 험한 히말라야로 달려오는 것일까. 히말라야의 설산들이 주는 불멸의 이미지와 초월적인 그림자, 혹은 영원성 때문일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설산들 사이에 와 있으면 거대한 심연과 같이 깊은 ‘사원’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다.

교회나 성당에 갔을 땐 주께서 그곳을 떠난 것 같고, 절에 갔을 때 역시 부처께서 배금주의에 매몰된 그곳을 떠난 것 같이 느낀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나는 한번도 신을 부정한 적이 없다. 때때로 가파른 설산 사이의 협곡을 걷다보면, 신의 길이 보이는 듯할 때도 있다. 문명권에서 이미 오래 전 잃어버린 본성의 길이다.

나는 경배드리는 마음으로 다시 떠난다. 토롱라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나간 설산들의 스카이라인 때문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푸르쿵(Purkung·6,120m)에서 출루 동봉(East Chulu·6,558m)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6,000m급 봉우리들의 도열이다. 그들과 맞서 왼쪽 방향으로는 묵티나스히말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한 번 가고 말면 영영 돌아나올 수 없는 심연의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히말라야의 협곡은 좁고 깊다. 어느 방향에선지 눈사태 굉음이 또 울린다.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 같은 사면 위의 적설을 올려다보다 말고 나는 한 차례 부르르 전신을 떨고 만다.

마침내 해발 5,416m의 토롱라를 향해 출발한다. 5,000m 가까운 토롱패디 하이캠프에서 일행 모두가 심한 고소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새벽 3시, 별이 총총하다. 대충 요기를 하고 로지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칼날 바람이 목덜미를 물어뜯고 달려든다. 방한복을 껴입고 겹으로 장갑을 꼈는데도 금방 손끝이 시리다. 체감온도로는 족히 영하 20℃를 넘을 것 같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끝내 고개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간 데다가 바람에 날린 눈들이 그나마 혹 있었을지 모르는 발자국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길은 우리 스스로 내면서 걸어야 한다.

8,000m 이상 등반경력도 많은 백전노장의 전문 셰르파와 동행해 온 것이 정말 다행이다. 전문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찾아 뚫고 나가면 그 뒤를 포터들이 밟고 가고, 비로소 우리 일행이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잡는다. 조금만 잘못 디뎌도 천길 벼랑으로 휩쓸려 갈 것인데, 지형이 눈 안에 들어오질 않으니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앞서 간 사람이 지도를 만드는구나.’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어찌 눈길을 가는 일뿐이겠는가. 앞서 간 사람을 쫓아서 가는 건 모방의 삶일 뿐이지만,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새로운 길을 내고 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고통스러운 탐험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길을 여는 사람들이 그렇고, 자신의 안락을 뿌리치고 놀라운 탐구심으로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여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를테면 콜럼버스가 길을 내어 우리는 태평양을 갖게 되었고, 라이트 형제가 있어 우리는 동력에 의한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에 오지 않았던가.

표고가 높아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어떤 순간의 바람은 허리를 세우고 전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지만 바람이 쌓인 눈들을 거칠게 날리기 때문에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바람과 맞서야 한다. 오전 9시쯤부터 인도 대륙과의 기압 차이에서 오는 바람이 불거라고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된 듯하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보라가 심할 때에도 숨거나 기댈 곳이 없으니까 겨우 허리를 잔뜩 굽히고 눈보라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손가락이 너무 시려 지팡이 잡은 손끝에 감각이 거의 없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한다.’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나밖에 따로 주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나만이 나를 다루어야 하는데 나를 다룰 때에는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하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몇 발자국 건너 사람들이 동행해 걷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거나 엄살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몸을 오로지 내가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다루어서 어둠과 무릎이 파묻히는 적설과 혹한을 뚫고 나갈 수밖에 없다. 함께 걷고 있으나 철저히 혼자 걷는 실존의 시간인 셈이다. 차츰 몸의 감각은 없어지고 오로지 관성을 쫓아 내 숨결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간다. 이른바 저절로 도달한 무념무상의 텅 빈 시간이다.


▲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 코스 중에서 가장 높은 곳(토롱라·5,416m)에 선 필자. 티벳 불교 상징인 룽다 깃발이 환영에 출렁거리고 있다.
 
‘정상은 종점이자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

이윽고 여명이 트고 해가 떠오른다. 햇빛은 보다 높은 정수리로부터 해발 고도를 따라 음계를 내려 짚듯이 툭툭툭 내려온다. 그것은 대자연의 놀라운 스펙트럼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오른쪽의 야카와캉과 왼쪽편의 카퉁캉 만년 빙하가 어느새 비슷한 눈높이로 닿아있다. 야카와캉은 검붉은 암봉 아래로 빙하가 뱀처럼 똬리를 틀었고, 부드러운 원형을 이룬 카퉁캉은 정수리로부터 발치에 이르기까지 만년 빙하의 윤기 나는 모자를 쓴 형국이다.

토롱라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꽤 넓은 내리닫이 분지를 이루면서 수많은 작은 언덕을 포개 놓고 있다. 올라가면서 보는 시선으로 토롱라는 마치 거대한 볼록렌즈를 여러 겹 포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이게 끝인가 하고 한 볼록렌즈를 올라가면 또 다른 볼록렌즈가 나오고 한 굽이길을 기어오르면 또 다른 굽이길이 다시 시작된다.

안내서엔 토롱패디 하이캠프에서 토롱라 정상까지는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되어 있으나 10시가 가까워서야 간신히 정상에 닿는다. 무려 7시간여가 걸린 셈이다. 작은 대피소와 돌을 쌓아 만든 초르텐과 오색 룽다가 토롱라 정상인 것을 말해준다. 묵티나스히말과 티베트로 이어지는 맞은편 무스탕 왕국쪽의 설산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정상이란 꼭대기가 아니다. 정상은 하나의 종점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이며, 만물이 생성하고 모습을 바꾸는 지점이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개 거봉을 완등한 위대한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린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만 우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정상에선 우리 모두 앞으로 걸어갈 길도 볼 수 있지만 이미 지나온 인생길의 그늘진 상처투성이 옹이들도 모두 보인다. 어서 오라고, 그 동안 고생 많았다고, 그러나 다 괜찮다고, 아침 10시의 순정한 햇빛을 받은 장엄한 히말라야가 나의 어깨를 다독거려주고 있다. 모든 길은 메스너의 말처럼 그래서 마침내 완성된다. 이제 내려가는 길의 시작이다.

* 본 사진들은 5월1일부터 31일까지 우리은행 강남 갤러리지점에서 전시된다.

/ 글 박범신 소설가·명지대 교수
출처 : 산들바람의 세상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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