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유럽… 뿌리깊은 자유주의 전통

언러브드 2021. 2. 1. 05:51

코로나 불길 못잡는 유럽… 뿌리깊은 자유주의 전통 한몫

 

역사·문화적 상대성 고려를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이미 백신 접종이 시작된 유럽은 각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도 아직 일일 확진자 수가 크게 줄지 않고 있다. 최근 추세를 보면 하루 평균 영국은 2만∼4만명, 프랑스는 1만∼3만명이 확진 판정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접하며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유럽인들의 국민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유럽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이 이런 현상을 야기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본다.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민의 자유가 지속적으로 확대돼 온 것이 사실이지만, 유럽은 자유주의 본산으로 개인의 자유를 지고의 가치로 믿는 경향이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동유럽은 1980년대 말까지 소비에트 블록에 속해 있었기에 아직도 국가 통제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아무튼 우리와 비교해볼 때 전반적으로 유럽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이 순간에도 공동체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정부의 방역지침에 항의하는 각종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행태가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하고, 현재의 유럽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자. 우선,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 기초하고 있다.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피조물이긴 하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는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 헬레니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중시한다. 따라서 신화의 세계에서 절대자로 인식되는 신들조차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존재로 묘사된다. 결국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 의지와 욕망에 따라 행동하며, 간섭당하기 싫어하는 ‘자유인’인 셈이다.

이 자유인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암흑기의 강력한 사회 통제 시스템에 의해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으나 14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지면서 인간 중심적 시각이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르네상스는 프랑스 말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즉, 중세에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시킨 신 때문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인간이 다시 중심으로 등장했다는 뜻이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부활로 해석될 수 있겠다. 17세기 이후에는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이 자연법 사상을 주창했는데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시각이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개인의 생명·자유·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 간 합의(계약)에 의해 국가라는 조직이 탄생했다는 이론이다. 국가가 이 권리를 침해하면 사회 구성원은 이에 저항해 새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프랑스 혁명 때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인간이 지닌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는 쉽게 침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유럽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지속됐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국 영국 권리장전(1689), 프랑스 인권선언(1789)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문건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자유가 최우선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 헌법에 명시된 국시도 자유, 평등, 우애인데 이 가운데 자유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을 보면 프랑스 사회가 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시민들에게 절대적 협조를 요청해도 유럽인들은 자신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침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협조할 뿐이다. 아시아 국가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대적 순응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은 외출 금지, 통금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할 때에도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다. 가령 하루에 한 시간은 체력 관리를 위해 일정 거리 내에서의 산책을 허용하거나, 식료품을 사기 위한 외출을 허용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위치추적 앱, QR코드 체크 등은 수용의 한계를 넘는 조치로 인식된다. 그러다 보니 봉쇄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거리에는 사람이 적지 않고, 무증상 확진자조차 우리처럼 강력한 통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유럽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다 보니 확진자 수는 생각만큼 빨리 줄지 않는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유럽인들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역사적으로 그들은 많은 피를 흘리면서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필자가 거주하는 프랑스의 목표는 하루 확진자 수를 5000명 이하로 묶는 것이다. 인구 규모도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는 확진자가 하루에 수백명 나와도 사회 전체가 바짝 긴장하는데, 프랑스는 일일 확진자가 5000명 이하로 유지되면 규제를 대폭 완화할 태세다.

결국 이는 방역과 경제를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갈 것인지 아니면 방역을 우선으로 하고 그 이후에 경제를 살릴 것인지,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 공동체 목표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양보할 준비가 돼 있는지 아니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인지 등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옳고 그름은 선택의 주체인 사회 구성원의 판단에 근거해야 한다. 따라서 외국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와 외국을 비교할 때는 역사적·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해야 보다 적절한 맥락에서 어떤 선택의 정책적 의미와 기대 효과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분명히 다르다.

 

 

[김영태의 지금 유럽은] 국민일보 기사입력 2021.02.01. 오전 4:03

김영태 OECD 국제교통포럼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