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이문열

언러브드 2014. 7. 26. 12:24

이문열 "남은 시간 얼마 없어..80년대 제대로 그려낼 것"

2014.07.26 09:19

"처음부터 기필(期必)한 것은 아니지만 꼭 12년 만에 '변경' 열두 권을 다시 출간한다. '변경' 절판을 결정한 그해 봄의 분개와 격앙이 이제는 울적함으로 떠오른다. 도와주러 올 이 없는 외딴 참호에 홀로 남아 자발없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첨병들과 가망 없는 진지전을 벌여야 했던 그 우울하고 참담했던 봄날."

긴 책에 붙은 짧은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 이문열이 이번에 다시 고쳐 펴낸 대하소설 '변경'의 머리말이다. 글의 행간에는 개작 이면의 짙은 사연이 어른거린다. 더 할 말이 많을 듯 싶어, 경기도 이천 설봉산 자락의 부악문원(負岳文院)으로 찾아갔다. 그의 자택과 집필실, 후학 문인들의 창작실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는 약간 부은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전날 밤 잠을 좀 설쳤다고 했다. 원두알을 통에서 꺼내 직접 갈아 내린 커피를 앞에 두고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오랜 만에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떤가.

"사실 이번 책 새로 내는 동안에, 특히 지난 반년은 반 죽다시피했다. 새로 쓴 것은 원고지 1000매 분량밖에 안 되는데, 전면 검토하면서 군데군데 손을 보다 보니까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원래 '변경'을 쓸 때 전편으로 삼고, 80년대를 다룬 후편 12권을 더 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살다 보니 약속을 못 지킨 채 계속 미뤄져 왔다. 이제라도 시작해야겠는데 다시 같은 제목으로 12권을 더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하소설이라는 양식도 이제는 사실상 죽은 양식인데, 그걸 미련스럽게 고집한다는 것도 의미 없는 것 같고. 물론 그 자체야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 변경 12권만 해도 국내에서 우리끼리야 참고 읽어줄 수 있는 작품 중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외국에는 제목밖에 못 나간다. 내가 특별한 세계적 지명도를 얻거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아마 영영 번역이 안 될 거다. 그래서 '변경'은 그것대로 완결 짓고, 후속 대하 장편은 제목을 달리 해서 따로 쓰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러다 보니 '변경'을 완결된 소설로 보자면, 지금 상태로는 허술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12권이 결국 주인공 각자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인데, 시대소설 혹은 교양소설로서는 완결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끝났다. 특히 인철이라는 인물만 하더라도 초판에서는 문학의 중간계급적 성격에 대한 설명이 마지막에 편지 한 줄로만 설명이 돼 있었는데, 이번에 장(章)을 새로 넣어 꼼꼼하게 보완했다. 그리고 다른 곳도 보충이나 해설을 곁들이다 보니 새로 쓴 원고량이 더 늘어났고 힘이 많이 들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건 언제인가?

"최종적으로는 2009년 봄에 돌아왔다. 미국엔 3년 있었다. 버클리 대학에 1년, 하버드 대학에 2년 있었다."

-그 기간 특별히 보고 느낀 게 있었나?

"버클리에서는 감수성이 활발하게 열리지 않아 약간 자폐적으로 보냈다. 그곳 사람들과 별로 섞이지 못했다. 글만 좀 썼다. 거기서 '호모 엑세쿠탄스'를 완성했다. 창작 '초한지'도 마무리하고. 하버드에서는 아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유학 온 사람들, 학생들과 어울려 지냈다. 맥켄 교수의 요청으로 엉뚱하게 시조를 강의하기도 하고, 영어로 번역된 내 작품 '시인'을 가지고 대학원 강독에 두어 달 참가하기도 했다.

-미국 체류가 어떤 전기나 계기가 됐나?

"전기라고는 할 수 없고, 다만 거기 있으면서 돌아보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쓸데없는 호전성과 공격성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쳐 놀란 적이 있다. 내가 더는 경박한 시대와 아웅다웅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 무엇보다 이런 무모한 적대감의 확대에서는 벗어나야겠다는 정도의 자극이 있었다. 동양학 부분에 있어서는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도서관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았다. 사실은 내가 87년도엔가 옌칭연구소 쪽으로부터 방문학자로 초청받은 적이 있는데 못 갔다. 그러다가 20년 만에 간 셈인데, 가서 보니 그때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말이라도 트이고 제대로 개안을 했으면 나중에 낭패는 안 당했을 걸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중국의 도서와 자료 전산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중국의 싸구려 상품만 생각하고 업신여겼는데, 지난 20년 동안 정리된 중국 문헌 자료들 규모가 엄청났다. 그게 전산화까지 다 돼 있었다. 이름만 듣던 희한한 책들이 모두 출간돼 예칭 서고를 몇 배나 늘려놓았더라. 그 책 하나만 해도 작은 우주 같다고 생각했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작은 칩 하나에 다 들어가 있었다. '사고전서' 전산화 팀 얘기를 나중에 들었는데, 몇 층짜리 건물에 전문학자 150명이 수용돼 5년 동안 작업한 거라고 하더라."

-최근 정민 교수가 낸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도 옌칭연구소 자료를 가지고 썼다.

"내가 87년에 방문했을 때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가 그곳에 1년 동안 방문교수로 와 있었는데, 매일같이 자료만 엄청나게 복사해서 귀국할 때 몇 짐 싸들고 왔다고 들었다."

-다시 변경으로 돌아가자면, 서문에서 이 책의 초점은 60년대이지만, 80년대를 쓰기 위한 것이었고, 2000년대가 80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80년대는 무엇이었나?

"우리 현대사를 보면 이상하게 왜곡되거나 인위적인 단절이 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단절될 수 없다. 어디가 됐든 연결고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지금 특히 현대사는 어떤 부분은 뚝 끊어져 전혀 낯선 부분이 이어진 것처럼 얘기들 한다. 그렇게 편향된 해석을 강요받고 그것과 다른 해석은 배척당한다. 어느새 역사 해석에 특정한 정향 같은 게 생겨났다. 사실 80년대에 대해서는 후일담 문학이라고 해서 작품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운동권에 있지는 않았지만 80년대를 같이 살았다. 그런데 그 시대 역사 인식과 해석에서 '이건 아닌데' 싶은 게 많아 보였다. 그런데도 제대로 말을 하는 사람이 안 보인다. 내가 80년대를 쓰려는 것은 그런 편향성이나 인위적인 단절, 정향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나도 시대의 사람인지라 그런 데 신경을 안 쓸 수는 없겠지만, 30년이면 CIA 1급 정보도 풀리는 마당에 왜 우리 현대사 인식만 그렇게 묶여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있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가면서 써볼까 한다. 이게 내게는 중요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다 못한 게 있으니까. 과거엔 원죄의식이나 부채의식에 지역적 자의식 같은 것도 있어 머뭇거리거나 미뤘다. 하지만 이젠 내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더구나 조리있게 총기있게 말할 시간은 더더욱 많지 않다. 어쨌거나 80년대 후일담 문학 식 시대 해석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읽게 되면 '아 맞아, 참 그런게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게 쓸 생각이다. 내 자신도 시대와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뒤틀린 점이 있어, 이제는 내 관점의 객관화도 잘 믿지를 못하겠지만 어쨌든 시작은 해봐야지. 나도 모르게 진영 논리에 끼어들어 가서 왜곡이 됐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걷어내야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너무 주눅 들어 너무 쉽게 포기한 것도 되찾아야겠고. 나로서도 시작을 하면서 고민이 참 많은 작품이다."

-그래선지 이번에 나온 개정판보다 그 다음 책에 대한 예고가 사람들을 더 기대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저 12권짜리 긴 책을 '마중물'이라고 했으니 그 다음 길어 올릴 것은 얼마나 돼야 할까 싶다.(웃음) 1차분으로 나올 게 3부작이다. 한 5000매 분량이 될 텐데 그걸로 정리가 되면 좋겠다. 영웅시대가 하나의 프롤로그가 되고 '변경' 12권에 이어 다음 작품을 에필로그로 닫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면 연작처럼 몇 번 하다가 맨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20세기로 달아야 할테고. 나도 진행을 해 봐야 알겠다. 내 자신도 대략의 방향은 잡고 있지만 범위나 정도는 확정이 된 게 아니라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떻든 역사는 주고받고 이어가는 것이지 갑자기 땅에서 솟는 법도 없고 그렇게 아름다운 이념만으로 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런 도그마나 프로퍼갠더의 허위를 벗겨내고 싶다."

-변경을 두고 스스로 '아메리카와 소비에트 두 제국의 변경'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소련이 와해되고 난 지금은 차이나 제국에 의해 대체된 상황인데.

"소련이 무너질 때만 해도 '역사의 종언'을 얘기한 후쿠마야 류의 엄청난 낙관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가 이제는 다시 제국 대체론이 등장했다. 그러니까 소련 자리에 차이나 제국이 대신 들어왔다는 얘긴데 글쎄, 잘 모르겠다. 차이나가 어떤 면에서는 옛소련보다 더 문제가 많을 수 있다. 경제 개방 이후 20~30년은 잘 해왔지만. 어찌 됐든 지금 미-중 시대는 내가 말한 변경에서의 구도가 갖는 의미는 상실한 게 아닌가 싶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도 카터 이후 도덕주의의 대두와 함께 많이 위축되었고. 중국이 소비에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고 해도 미-소 제국 시대 변경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소 대결 때 같은 이념 경쟁의 접점은 아니더라도, 지정학적인 의미에서 변경이라는 숙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 아닌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간의 틈바구니라는 상황에서 오는.

"그건 많은 반도 국가의 운명이다. 사실 분단 같은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두 세력이 기회만 있으면 분단을 시도했다. 아시아 세계만 보더라도 오래전부터 분단 기도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중국과 일본 간에 논의됐던 조선 남부 4도 할양도 그대로 시행됐다면 38선 비슷한 형국이 될 거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때도 38선 안이 선보인 적이 있고 프랑스도 그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그런 지정학적인 운명은 변함이 없겠지만, 내가 말한 변경, 특별한 산술로 운영되는 변경은 이제 끝났다고 본다. 그래서 후편에서는 그 제목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다."

-'변경'에서 '중간 계급'으로 설정한 지식인을 주인공(인철)으로 내세웠는데.

"80년대에 나는 생산수단을 두고 분류된 계급보다는 기능과 가치의 문제로 계층이나 신분을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리그즈(Fred W. Riggs)의 '프리즘적 사회'(prismatic society) 논의를 차용한 수평적 분화 사회의 이상 같은 것을 꿈꿨다. 그러니까 발전된 사회는 모든 기능이 분리되고 그 기능 사이의 가치체계는 상호 수평적이고 모든 기능은 등가(等價)여서 무엇이 무엇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수직적 서열이 없는 그런 사회가 그 시절 나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행하던 수직적 혹은 통합적 가치론, 문학이든 무엇이든 당대의 공동선에 복무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 모든 사회의 기능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규정한 민족 또는 민중에 복무해야 한다는 그런 논리에서 자유롭기 위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문학은 자기목적적이고 자기완성적이며 또한 자족적이라는 입장으로, 일견 문학지상주의와 유사한 데가 있었다. 누가 와서 어떤 거창한 공동선에 복무하라고 요구해도 내게는 그런 복무 의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쓸 80년대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그대로 유지가 되나?

"아마는 그럴 것이다. 자신을 중간계급으로 자리매김한 작가가 80년대를 관통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거칠게 충돌하는 두 기본 계급 사이에 끼어 그들의 벌거숭이 욕망과 눈먼 적개심을 조정하고 제어하기는커녕 양쪽 모두에게 상처 입고 무너지는 고색창연한 예술가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변경도 그렇고 이념이라는 것이 작가에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언제나 가위 눌려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러다 보닌 국내 이념 갈등의 뜨거운 상징처럼 된 듯하다.

"그건 실제로 그런 점도 있지만, 요즘 이 사회의 특징인 인상짓기, 인터넷 시대의 이미지 조작 같은 것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 피해 의식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괴물'이 돼 있다는 느낌을 늘 가진다."

-밖에서 날아온 돌에 억울하게 맞은 것도 있고, 그걸 맞다가 못 참고 나서다가 본인이 자초하거나 불사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서로 적대감이 상승하다가 격화되어 내가 공격적이 된 것도 있을 것이다. 그건 싸움의 어떤 국면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금 인상지어져 있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실제보다 굉장히 부풀려서 전파된 것이 많다. 가령, 대표적인 게 '이문열은 작가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을 당연한 듯이 하는데 그것처럼 허구가 없다. 80년대 문학적 화두가 참여와 순수였고, 참여가 바로 정치적 사회적 참여였다. 지금 모모라는 사람들은 그때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개입해서 이름을 얻은 사람이 적지 않다. 감옥에도 갔다 오고 고생은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정치적인 활동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문학을 한 거고, 내가 참다못해 몇 마디 말하거나 한시적인 국회의원 공천 심사위원 75일 한 것을 두고서는 엄청나게 떠들어 댄다. 그렇게 치면 그전에도 그렇고 이번 대선 때에도 그렇고 문인들이 정치를 얼마나 했나. 야당 공천 심사위원만 해도 문인이 여러 번 있었다. 인터넷 시대의 고약한 덫에 나만 모질게 걸려있는 느낌이 든다. 그걸 생각하면 편안히 얘기하다가도 열이 확 오른다."

-이 작가를 둘러싼 이념 시비의 절정이 2001년 '책 화형식'이었는데.

"절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게 시작이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린 것도 그 때이고. 그전에는 인터넷에 정치적인 활동이 있어도, 문화 운동 형식으로 무기화한 것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나는 괴물처럼 돼 있다. 내 책은 한 줄도 읽지 않고 한 때 인터넷을 뒤덮었던 욕부터 되뇌고 보는 세태를 보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아직도 대학 현대문학 교양 강좌에서 작가를 물어보면 많이 알려진 작가로 꼽히지만, 좋은 뜻의 '유명한(famous)'이 아니라 '악명높은(notorious)'에 해당한다. 정치적인 작가, '보수 꼴통'으로만 안다. 그런 사람에게 내 책을 읽어봤느냐고 물으면, 기껏해야 '삼국지'를 댄다. 그건 원작자가 따로 있고 나는 평역을 했을 뿐인데."(웃음)

-'책 화형식'에 상처입었던 마음은 정리가 됐나?

"정리가 돼야지. 그거야 숨어서 한 거니까. 여기(부악문원) 와서 한 것은 책 장례식이었고, 책 화형식은 옥천에서 했다. 더 못된 일도 많이 있었다. 그 전파력에 의해 읽지 않고 욕하는 세대가 형성된 후에 내가 괴물이 됐다. 그런 병폐는 요즘도 심심찮게 본다. 세월호 침몰 사고 때에도 그랬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사실인 것처럼 전파되고 일방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지 않았나. 의도가 들여다 보이는 왜곡이 너무 천연스럽게 통용된다. 그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심해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법도 그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여전히 진영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 같다.

"우리 문단의 경우에는 특히 쏠림 현상이 심하다. 지금까지 대선이 여섯 번 있는 동안 투표 결과는 유권자 지지율로 보면 대략 55대 45 사이에서 여야가 갈렸다. 하지만 문인들의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이념 혹은 정파적 성향은 좌우 내지 보혁이 9대 1 내지 10대0에 가깝다. 이건 이상한 거다. 얼마 전 방송 대담 프로에 나갔는데 그 앞에 출연한 조정래 선배가 나와서 "작가는 모두 진보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회 모순에 대해 발언하려면 진보여야 한다고 했다는 거다. 젊은 작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거나 적어도 다른 말은 안 한다. 이상한 습관이다. 단순히 수치만 봐도 이상한 걸 알 수 있을 텐데. 만약 작가는 일반 유권자와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그렇게 특출나고 특권적인 부류는 아니지 않나."

-미국이나 외국에도 보면 작가들 중에는 진보 성향이 많지 않나?

"그래봤자 6:4 정도이거나 7:3을 크게 넘지 안 넘는다고 들었다. 다만 떠드는 목소리가 크게 들릴 분이다. 그리고 미국만 해도 좌든 우든 서로 동의하는 부분이 폭넓게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시사잡지 '뉴 리퍼블릭'지는 지나친 정파적 투쟁이 국익을 해치고 있다는 걱정을 이슈로 다루기도 했다."

-당신의 문학적 재능이나 잠재력이 정치적으로 낭비됐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해석이 될 수도 있고, 맞는 해석일 수도 있고,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내가 보기엔 그런 자극도 있어서 변경 이후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 중에서 '사람의 아들'과 '변경'을 두고 어느 게 더 좋은 작품이냐의 문제는 나중에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정치는 우리 한국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지 않는 것은 오히려 터무니없는 허구로 몰 수도 있다."

-한국의 현대가 분단과 더불어 시작됐고, 그 후 큰 갈등의 골도 거기서 비롯한다. 이 작가의 개인사적으로도 분단과 이념의 문제가 깔려 있는데,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내가 개인적으로 지명도를 얻고 약간의 영향력을 얻으면서 강요되는 정치 역할 같은 것들이 있다. 전반은 덜했는데 후반으로 올수록 외부 자극 때문에 질문에 답하고 도전에 응전하고 이러면서 내 문학의 정치적인 관심이 확대된 측면이 있다."

-선생은 스스로 '유복자(遺腹子) 세대'라는 말도 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는 살부(殺父) 문제는 문학에서 주요 테마이기도 한데, 지금은 해소가 됐나.

"그건 극복했다.옛날 오기를 부릴 때는 스스로 삼무자(三無者)라고 해서 나라도 아비도 선생도 없다고 떠벌인 적도 있지만. 아버지 문제가 일정한 방향으로 영향을 준 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심하게 나를 왜곡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왜곡됐는지는 모르지만."

-좌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근저에 영향이 남아있는 것 아닐까?

"초기엔 아버지 문제에서 오는 경계심이나 공포가 대단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83년도에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이 허용됐는데, 그게 얼마나 큰 감격이었는가 하면, 내가 외국 나가게 됐다고 하니까 형제들이 와서 함께 감격해서 울 정도였다. 우리도 이제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됐다고. 우리 경우엔 외국을 나가고 안 나가고가 인생에서 여러가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대학 전공까지도 아버지에서 비롯되는 이념 문제를 고려해서 결정해야 했다. 그 기준 중 하나가 외국에 나가지 않고서도 공부할 수 있는 분야이냐 아니냐였다. 처음 해외 여행을 앞두고도 걱정이 많았다. 북한 공관이 나가 있는 나라에 들어갈 때는 절대로 혼자 외출하지 않았다. 반드시 누군가 알리바이를 제시해줄 사람을 찾아 동행했다. 내가 공안당국의 미움을 받게 될 때 그들이 나를 대공 혐의로 옭을 수 없도록. 하지만 좌우 문제에 대한 나의 마지막 태도는 그 뒤 나름의 터득에서 결정됐다고 본다."

-아버지의 월북과 좌절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가?

"단순하게는 그런 것도 있다. 그래서 나를 두고 이데올로기와 사감을 혼동한다고 공격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잘 됐으면 네가 지금처럼 그랬겠느냐, 숙청당하고 불행하게 됐으니 앙심을 품은 것 아니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무의식중에 그리 됐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철이 들면 누구나 나름의 아버지 찾기를 한다. 나도 한때 아버지를 알아보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게 좀 길었다. 꽤 깊이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나름대로 글을 안 후에 책 읽기를 좋아한 것도 어느 시기까지는 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그때는 마르크스 관련 도서가 엄중한 금서였기 때문에 주로 비판서의 행간이나 주(註)를 통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쯤 해서 결국 '추수(追隨)할 수는 없음'으로 결론짓고 씁쓸하게 돌아섰다. 지금에 와서 돌아봐도 결론을 내릴 만한 나이였다고 생각한다. 내 무의식에서 아버지의 선택이 어떤 친연성(親緣性)으로 작용했을 수는 있지만 끝내 '아 맞아, 그가 옳았어'라고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동기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남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둘째는 미학적 만족, 셋째는 역사적 사실을 남기려는 기록관으로서 의무감, 넷째는 정치적 목적이다. 어느 쪽인가?

"우선 분류 자체가 그리 정교한 문예 이론 같진 않아 보인다. 그 자체가 알레고리를 많이 쓴 작가다운 분류법이다. 글쓰기 동기는 복합적일 수 있다. 네 가지 동기가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글로 나를 드러내는 것과 온당한 정치적 식견으로 세상의 결정을 유도하는 것을 합친 복합적인 것일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쪽이 강한 편인가.

"아마도 나는 정치적 식견보다는 미학적인 글쓰기를 통해 동의를 얻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정치적 식견에서 박수를 받으면 오히려 내심 불안해하는 편이다."

-결국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현시욕 아닌가?

"틀림없이 문학하는 행위에는 자기 현시욕에 이끌린 부분이 있다고 본다. 다만 그 실현 방식에 있어서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다. 대중의 갈채에서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대중의 갈채와 상관 없이 미학적 완성을 더 높이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침 진보 논객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시민씨가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냈는데, 서문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스스로를 '쁘띠 부르주아 리버럴'이라 부르면서, 지금 대한민국은 불완전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59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보면 좌우 대결이 뜨거웠던 80년대에 비하면 양쪽 다 이제 돌아보는 분위기가 된 것도 같다. 현대사 55년을 보면서 제한적인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느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이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합법적이지 못했던 시절에는, 소위 보수 반동 세력에 대해서는 운동 권이 용서할 여지가 없었다. 80년대 후반까지도 이승만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유신 세력을 온당하게 규정하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이른바 '읽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에 그런 보수 세력에게 이름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이승만은 언제나 분단의 원흉으로 불렸고, 근대화 노력에 상관없이 유신 세력 또한 그 어떤 이름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처음으로 '건국 세력' '산업화 세력' '근대화 세력'이라는 표현도 생겼다. 민주화 세력이 인정받으면서 그런 이름이 생겨난 셈이다. 그럼 면에서 나도 역사의 진보에 대해 어느 정도는 희망을 갖고 있다. 지금은 불화, 불통하고 있지만. 민주화 운동이 우리 사회의 한 주류로 인정받으면서,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와 함께 그걸 가능하 만든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걸 가능하게 한 온당한 세력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함께 나눌 파이를 키운 공헌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했다고 들린다. 내가 비관론자인데 낙관을 할 때가 있다. 내가 80년대를 쓰겠다고 나서는 것도 역사에서 미비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 문학의 한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체 우리 사회를 볼 때, 유씨가 말한 것도 우리 사회를 희망적이게 하는 징표라고 본다. 그의 발언이 진심이라면. 우리가 운동권이나 주사파라고 불리는 세력에 대해 가졌던 의심이나 불안이 많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

-이제는 작가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문학 세계는 작가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장은 문학시장이나 출판시장이 될 테고 소비자들이 있는데, 그 구조는 생산자와 소비자, 수요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과거 문학 이론에서는 문학 수요자들, 곧 독자는 별도의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생산적 독자, 창조적 독자라는 말을 쓴다. 실제로도 옳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이제는 상품 생산이 됐다. 문학도 문예 상품이 되어 일반 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와 같은 구조를 가지게 됐다. 독자 수요가 주는 압력을 작가들도 이제 더는 무시하지 못한다. 옛날 같으면 독자, 곧 수요를 미리 염두에 둔다고 말하면 속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누구도 '나는 독자는 상관없다'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 문학 생산도 그 시대 소비자들이, 수요가 결정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 불행히도 활자 시장이 파괴되고 독자가 지리멸렬해져 버렸다. 모두 단문 단답 즉문즉답 형태의 교신에 함몰돼 있다. 지금은 독자 수요 변화에 먼저 문의하고 그 다음 작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

-그 변화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미디어 환경이 글의 쓰기와 읽기, 유통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소통 양식이 가지고 있는 결정력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카카오톡과 내 작품 연재를 기획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카카오톡에 맞게 내 이야기를 팔자는 제안이었는데, 잘 팔리는 삼국지를 200개 에피소드로 잘라 나눠 연재하는 식이었다. 1회분을 써서 보냈더니 그쪽 편집부에서 손을 들었다. 내 문장이 긴 편인데, 카카오톡에서는 한 페이지가 쉽게 넘어버린 경우가 있다. 또 이제는 즉문즉답 형식이 주를 이룬다. 종이책은 읽다가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지만 SNS는 그렇지 않다. 단문도 자극적이고 기억하기 좋고 전파되기 좋은 형태이지 다른 이미지를 품고 있는 것이거나 상대의 사고력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동시키거나 하는 것은 필요없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모른다. 이런 시대가 시작된 지 이제 한 20년 지났는데 이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활자 수요라는 것도 이대로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나만 해도, 유장한 생각에 빠져보고 싶을 때가 있고, 나를 설명할 때도 길고 풍부하게, 그리고 제대로 된 문장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 몇 천 년 동안 즐겨왔고 익숙했던 것인데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온라인이나 디지털 디바이스를 얼마나 이용하나?

"디지털 단말기는 전혀 안 쓴다. 인터넷으로 뉴스나 자료 검색을 하는 정도다."

-또다른 세계가 그쪽에서 펼쳐지는 상황인데 그 부분을 모르면 되나.

"정보가 필요할 때는 나도 쓴다. 하지만 굉장히 불안해 조심스럽게 쓴다. 정보나 지식을 찾으러 갔다가 틀린 것을 찾아 낭패를 보기도 한다. 광범위한 방대한 정보량은 분명히 유용하다. 한때 작가에게는 큰 밑천이 되었던 독서만큼의 유용성이 있다. 이제는 독서량이 부족한 작가도 글을 쓸 수 있게 됐고, 정보량 자체가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국엔 인터넷 정보도 시간이 지나면서 평균화될 것이라고 본다. 내 습관적 믿음인지, 근거있는 관측인지는 모르지만, 활자 형태의 오랜 소통 양식이 그리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정도까지 줄어드냐의 문제이지 존폐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책이 밑천이라고 했는데 요즘 독서는 얼마나 하나?

"많이 읽지는 못한다. 바쁘기도 하고, 책 읽는 힘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작년 여름 흥이 나서 책을 읽었는데 네 권에 두 달이 걸렸다. 물론 페이지는 많았다. 두 권짜리 폴 존슨의 '모던타임스'와 막스 갈로가 쓴 두 권짜리 '프랑스 대혁명'을 읽다가 7~8월이 다 갔다."

-책을 택해서 정독하는 편인가,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 게 아니라?

"정독하는 편이다. 하나를 다 보고 그 다음 책을 보는 식이다. 동시에 보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럴 때는 분야가 다른 걸 본다. 예를 들면, 소설 한 권에 철학 에세이 같은 건 같이 읽을 수 있다."

-어떤 책을 주로 보나? 기준이 있나?

"그때그때 흥이 나는 것. 요즘은 많이 읽지를 못한다. 작년엔 변경 때문에 별로 못 봤다. 이제 보려는데 모르겠다. 글 쓰려면 또 시간이 안 난다."

-아까 얘기한 두 책은 모두 역사서인데.

"그러고 보니 역사책, 역사 평론을 많이 보는 편이다." (그의 집필실에는 인물 전기와 평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요즘 유행인 진화생물학이나 인지과학은 어떤가?

"인지과학 책은 한 10년 전에 많이 봤다. 당시로는 새로운 분야로 받아들여졌는데 무슨 일인가로 한 번에 대학 교재 4~5권을 사서 집중학습 방식으로 읽어본 적이 있다. 진화생물학은 민음사에서 낸 대우총서 2권짜리 생물진화학인가, 사회진화론인가, 하는 책을 본 게 마지막이다."

-진화심리학 계열 도서로 최근 화제가 된 것이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이라는 책인데, 여기서는 사람의 도덕적·정치적 성향을 입맛과 같다고 한다. 날 때부터 안전을 우선하는 사람은 보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은 진보 성향을 띌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또 진보 성향은 몇 가지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반해 보수 성향은 잡식성으로 다양한 기준을 적용한다고 설명한다.

"낙관과 비관으로 가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하는 태도를 두고 보수와 진보를 가르기도 한다.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조정래 선배 말을 전해 듣고 내가 이야기했다. 모순이라는 것은 과거에만 있는게 아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기대도 잘못될 경우에는 해악이 클 수 있다. 그게 잘못될 경우 부패한 기득권 질서 못지않은 해악을 초래한다. 모순이 항상 과거에만 있다는 것도 이상한 단정이다. 작가가 진보여야 한다는 말도 이상한 단정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 시급한 것 중에 하나가 보수진보 개념의 정의다. 지금 너무 혼동돼 있다. 지금 한국 상황에서 합당한 개념을 제대로 정의해 놓고 분류하고 싶을 정도다."

-작가 이문열을 만든 책을 꼽는다면?

"그런 책이야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천 년 이상 된 것들."

-구체적으로 거명한다면?

"여기 부악문원을 열고 처음에 사서삼경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강독회를 했다. 그 때 내 생각은, 우리가 뭘 하든 간에 되풀이해서 읽고 인용해도 괜찮을 책을 골랐다. 동서양의 고전은 그전까지의 산만한 지식 체계를 가장 먼저 편술하면서 보편성을 구축한 것들로, 후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이다. 막연한 개념만이라도 의식의 바닥에 침전시키기 위해서는 두 번 세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책이 평생 두고 볼 책이 된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

"'가장'이란 말을 덧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여럿 있다. 하지만 거명하기는 조심스럽다. 살아있는 사람을 거론하면 줄 세우는 꼴이 될 수도 있고, 원로가 빠지면 섭섭해 할 수도 있고.(웃음).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황석영 선배가 다양성이나 기교의 화려함이나 독특한 안목, 모든 면에서 우뚝하다. 진지하게 파고 드는 걸로는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 선생은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살피고 이모저모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웃음) 최인훈 선생도 거대담론적 사고로 가공해 내는 것을 보면 언제나 감탄스럽다. 이병주 선생의 글도 그 풍려(豐麗)와 우미(優美)를 좋아한다. 특히 '지리산'은 압권이다. 자발없는 표절 시비로 상처를 입긴 했지만, 한길사에서 나온 걸 최근에 다시 봤는데 정말 잘 쓴 글이었다. 그밖에도 우리 문단은 풍성한 자산이 있다."

-다른 작가의 글을 보고 질투도 하나?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이거 참 좋은 건데 이제 나는 그걸 쓸 수 없게 됐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이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묘비명을 쓴다면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내 작품 중 어떤 것으로 기억되는 사람."

-어떤 작품이 그 후보가 될까?

"글쎄. 늘 말한 대로 하면 아직 안 쓴 것.(웃음) 제일 늦게 쓰려고 마음 먹고 있는 것. 이제 와서 얘기지만, 예전에는 뭔가 아직 대단한 게 남아있는 척, 간단하게 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좀 남았다고 해도 제대로 생산할 시간은 10년이 채 안 남았다. 한두 개 밖에 더 쓰겠나. 아마도 내후년쯤에는 이미 쓴 것 중에서 하나 골라놔야 할 것 같다."

-그런 말을 하기는 이르지 않나.

"내 나이가 올해 66세다. 사는 거야 20년 살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도 어려울 것 같다. 70 넘어까지 좋은 작품 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80 넘어서도 쓰는 사람 있지 않나.

"제대로 된 작품은 없다. 70 넘어 쓴 것들도 대개는 그렇다. 흔히 괴테 얘기를 많이 하는데, 괴테는 '파우스트'가 일생에 걸친 문학 관리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듣기로는 파우스트 3부까지는 40대에 이미 쓰여졌고, 마지막 4부를 70대에 끝냈다고 한다. 그것도 노트는 미리 돼있었고 마무리를 한 것이라던가."

-톨스토이는?

"오래도록 썼다. '안나 까레리나'도 70이 넘어 썼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재미있게는 보지만 그것이 톨스토이 최고의 작품으로 치지는 않는다. 더 있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덤 같은 것. 그렇게 보면 나도 이미 다 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았다고는 우겨는 봐야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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