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영화

데브라 윙거, Mary Debra Winger

언러브드 2012. 1. 31. 07:21

까칠하지만 당당했던 데보라 윙거 돌아왔다


가족간의 사랑과 화해를 그린 앤 헤서웨이 주연의 ‘레이첼 결혼하다’를 봤습니다.

‘양들의 침묵’'필라델피아’의 조너선 드미 감독이 연출을 맡은‘레이첼 결혼하다’는 오는 22일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주인공 앤 헤서웨이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더욱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프린세스 브라이드’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앤 헤서웨이가 단순히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연기력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더군요. 십대 중반부터 마약 중독으로 재활원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킴벌리 역할을 맡아 복잡미묘한 내면 심리 연기를 완벽히 보여주었습니다.

킴벌리가 천사같이 착한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재활원을 나오는 걸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킴벌리는 십대 때 사고로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지만 가족들은 그 뜻을 이해하려기보다 결혼식을 망칠까봐 걱정스러운 눈으로 킴벌리를 바라봅니다. 킴버리와 가족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우면서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나갑니다. 서로에게 그 누구보다 큰 상처를 주지만 피를 나눴기에 금세 용서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사관과 신사'에서 데보라 윙거가 리차드 기어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앤 헤서웨이의 뛰어난 연기를 보는 즐거움도 컸지만 이 영화에서 반가운 얼굴 하나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어 더욱 행복했습니다. 바로 킴벌리의 어머니 역을 맡은 데브라 윙거 때문이었죠. 윙거는 현재 40대 이상의 영화팬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영화 ‘사관과 신사’의 여주인공이었습니다.

1983년 국내에서도 개봉돼 흥행에 성공을 거둔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사관과 신사’는 터프한 사관 생도와 억척스러운 여공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멜로영화입니다. 영화 결말부 리처드 기어가 공장 문을 열고 들어가 작업대에서 일하고 있던 데브라 윙거를 번쩍 안고 나오는 모습은 당시 모든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데브라 윙거는 이 영화에서 생기 넘치는 청순한 외모와 탄탄한 연기력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습니다.

데브라 윙거는 이 영화로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톱여배우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출연한 ‘애정의 조건’은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또다시 윙거를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윙거의 경력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국내에서 개봉돼 화제를 모은 ‘블랙 위도우’를 비롯해 ‘배신’, ‘위험한 여인’, ‘마지막 사랑’ 등에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였습니다. 앤소니 홉킨스와 함께 출연한 1993년작 ‘쉐도우 랜드’로 세번째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 지명을 받지만 할리우드 중심에서 차차 멀어져 갔습니다.

그 이유는 타협할지 모르는 불같은 성격 때문입니다. 윙거는 상업적인 성공보다 예술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흥행에 성공한 많은 작품을 거절했습니다. 또한 할리우드 내에서 존재하는 남녀차별에 대해 선봉에 서서 싸워나갔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남녀 배우의 개런티차와 여배우가 나이가 들수록 할 만한 역할이 없어지는 현실을 성토했습니다.

데브라 윙거가 거절한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글렌 클로즈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위험한 정사’입니다. 여주인공 알렉스 역의 캐스팅 1순위는 데브라 윙거였습니다. 지나 데이비스가 출연한 ‘그들만의 리그’에서도 당시 톱스타였던 마돈나와의 불화로 역할에서 자진 사퇴했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시나리오들이 데브라 윙거에게 가장 먼저 도착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윙거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터뷰에서 불만을 솔직히 털어놓는 걸로 유명합니다. ‘사관과 신사’에서 톱스타 리처드 기어와의 베드신에 대해 “구역질 났다”고 털어놓아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호흡을 맞춘 ‘리갈 이글스’에 대해서는 “형편 없는 영화”라고 말해 악명을 높였습니다. 이런 까칠한 성격 때문에 차츰차츰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의 기피 대상이 돼갔습니다. 1996년 빌리 크리스털과 함께 출연한 ‘파리가 당신을 부를 때’ 이후 할리우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게 됐죠. 1997년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육아에만 전념하며 은둔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좋은 역할을 찾는 것에 대한 의욕을 잃은 것일 수도 있겠죠.

데브라 윙거가 사라진 지 5년 후 흥미로운 작품이 할리우드에 등장했습니다. 동료 여배우 로잔느 아퀘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데브라 윙거를 찾어서’였습니다. 한때 할리우드 정상의 여배우였다가 사라진 데브라 윙거의 행방에 궁금증을 느낀 아퀘트가 샤론 스톤·다이앤 레인·우피 골드버그 등 같은 또래 동료 여배우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남녀차별이 횡행하는 할리우드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30대 이상 여배우들의 고민을 심층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데브라 윙거도 영화 결말부에 출연해 할리우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물이 오르는 열정에 비해 그걸 펼칠 만한 공간이 없는 여배우들의 애환이 생생하게 느껴지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데브라 윙거가 오랜만에 할리우드에 돌아와 촬영한 ‘레이첼 결혼하다’에서 그녀가 연기한 엄마 애비의 비중은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대배우가 연기하는지라 역시 존재감은 큽니다. 애비는 마약중독자 딸 킴벌리의 실수로 아들을 잃고 남편과 이혼해 새로 가정을 꾸립니다. 윙거는 딸을 사랑하지만 딸로 인해 입은 상처를 숨길 수 없는 모정을 소름끼치도록 섬세하면서도 파워풀하게 연기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윙거는 세월의 흐름을 알게 해주는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해 안쓰러움이 약간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윙거는 처음부터 미녀배우는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여전히 탄탄한 연기력에 더욱 신뢰감이 갔습니다. 역시 훌륭한 여배우였습니다.

영화를 보고난 뒤 인터넷을 뒤지며 데브라 윙거의 차기작이 뭔지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저기 뒤져보아도 새로운 정보가 눈에 띄지 않더군요. 아쉬웠습니다. 여기에서 끝내기에는 그 재능이 너무 아깝습니다. 아카데미상은 한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브라 윙거가 어서 좋은 작품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충무로에서도 재능 있는 여배우들이 남배우들만큼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데브라 윙거를 보면서 왠지 할 역할이 없어 오랜 재충전기를 갖고 있는 우리네 여배우들의 모습이 오버랩됐거든요. 우리 영화계도 ‘월드스타’ 강수연을 너무 오래 쉬게 만드네요. 배우란 직업은 화려하지만 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참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데브라 윙거가 출연한 ‘레이첼 결혼하다’는 오는 26일 예술 전용관 위주로 소규모 개봉됩니다. 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작품입니다. 최재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