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람

[세상읽기] 나를 ‘좌빨’이라 부르는 당신에게 / 김별아

언러브드 2009. 7. 29. 15:15

[세상읽기] 나를 ‘좌빨’이라 부르는 당신에게 / 김별아
한겨레
» 김별아 소설가
프랑스의 시인 랭보를 읽노라면 날랜 손아귀에 심장을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려 읽었던 시 중에 <모음들>이라는 작품이 기억난다. ‘A는 검은색, E는 하얀색, I는 붉은색, U는 초록색, O는 푸른색: 모음들이여! 내 언젠가 그대들의 탄생의 비밀을 말하리’로 시작되는 그 시는 ‘바람구두를 신은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랭보의 천재성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고작 범재이거나 둔재인 문학소녀에 불과했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소년의 재능에 홀려 그를 흉내 내어 골똘히 고민했다. ‘ㅏ’는 ‘ㅗ’는 ‘ㅡ’는 ‘ㅣ’는, 과연 세상의 어떤 빛깔을 닮았을까?

문학에 매혹된다는 것은 언어에 매혹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나 언제나 쓰고 있지만 누구도 좀처럼 밝혀낼 수 없는 언어의 비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인들의 눈에는 좀 웃겨 보일 게 분명하다. 길가에 핀 민들레꽃 앞에 쪼그려 앉아서 ‘이 꽃이 왜 민들레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든지, 밥을 먹다가 김치 한 조각을 집어들고 ‘아, 이건 정말 김치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일 따위가 말이다. 나는 그것이 언어, 그중에서도 모국어의 신비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강렬한 감각, 학습되기보다는 유전되기에 더 적합한 감성이 모국어 안에 있다.

출판사를 통해 전해온 익명의 편지에 적힌 ‘좌빨’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을 한다. ‘좌익’(혹은 좌파)과 ‘빨갱이’가 결합된 나름 신조어라면 신조어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못생긴 말이 내가 사랑하는 모국어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ㅘ’라는 이중모음에서 부정의 결기가 전해지고 무성 파열음 ‘ㅃ’에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든 자음과 모음이 한데 어울려, 얼굴근육을 와락 구기고 눈을 홉뜨지 않고는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가 탄생했다. 아마도 지난번 신문에 게재한 칼럼이 편지 쓴 이의 심정을 격하게 만들었나 보다.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음을 ‘좌빨’이라는 단어 하나로 명백히 밝혔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가 없다’라든가 ‘어륀쥐’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 나를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 독해력 결핍이 판치는 세상에 작가로 살면서 그 정도 오독이야 흥야항야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좌빨’이라 불러주기 전까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내가, 그가 나를 ‘좌빨’이라 부른다고 해서 그에게로 가서 ‘좌빨’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부지런히 역사를 읽으려 한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경험 이상의 교훈을 얻는 것이다. 뱀은 뱀끼리 싸울 때 끝내 독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독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무기일 뿐, 동종끼리의 시비에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뱀보다 못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해방공간에서의 좌우익 테러, 한국전쟁, 그리고 내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으로 꼽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살육전 또한 뱀이 뱀에게 독을 쓴 실례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를 알면 알수록 분노보다는 슬픔이, 증오보다는 평화의 소망이 커진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다시는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 쓰지 않기를, 비명과 신음으로 대화를 대신하지 않기를.

그리고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덧붙여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파’(自派)다. 자파인 ‘작가’다. 그러니 경계할 것도, 안심할 것도 없다.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