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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과천'이 아니라 '보통 과천'이 좋아요"

언러브드 2009. 5. 10. 08:29

"'1등 과천'이 아니라 '보통 과천'이 좋아요"

[한국에서 살아보니] 도서관 가는 길, 내가 넘는 아홉 고개

기사입력 2009-05-09 오전 5:21:37

 

 

도서관과 나, 그리고 길 가운데 기념비

내 인생에서 도서관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 당장 생계에 지장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는 게 한참 팍팍할 것이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에는 언제고 그곳에 갈 수 있고, 가면 볼 책이 있고, 빌려올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도서관이 한때는 내 피난처 구실을 한 적도 있다. 낯선 동네에서 어디 한군데 기댈 데가 없을 때 도서관에 가서 소일을 하면서 나를 달랬다.

지금은 동네의 도서관이 내 서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좁은 집에 자꾸 쌓이는 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큰맘 먹고 일부를 헌책방에 내주고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이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책을 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신, 사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내가 사는 과천의 도립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을 한다. 다행히 희망도서 신청이 대부분은 받아들여져 시간이 지나면 원하는 신간을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으니 이것만도 얼마나 다행이랴. 외국처럼 책은 권수에 제한 없이 한 달 동안 빌릴 수 있고 CD며 DVD까지도 다양하게 빌려다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도서관 이용이 많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서관 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내가 넘어야 하는 아홉 고개에 관한 이야기다.

신청한 희망도서를 빌리러 도서관에 가기도 하지만, 나는 시간이 나면 들러서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구경하며 서성인다. 그러다 읽고 싶은 책을 건져오는 재미가 크다. 심심할 때, 아무 약속이 없을 때에도 나들이 삼아 도서관을 간다. 이처럼 내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도서관 가는 일이 나는 즐거우면서도 아주 즐겁지만은 않다. 도서관 가는 길에 아홉 고개가 있는 까닭이다.

우리 집에서 도서관에 가려면 우선 관악산 밑 향교말길에서 나와 은행나무가 늘어선 보도를 따라 굴다리 밑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곳은 과천의 중심을 관통하는 4차선 큰 길에서 관악산 밑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이자 보행자 길로 과천의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과천이 80년대 초 계획도시로 새로 태어나면서부터 만들어진 이 길은 양 옆의 나무들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듯 제법 굵게 자라있다. 푸르른 나뭇가지들이 무성하게 우거져서 한여름에는 녹색터널을 이루는 이 길에 들어서면 아늑한 휴식의 느낌이 든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주로 할머니들이 모여앉아 이야기 하고 노는 벤치가 나오고, 날마다 그 옆을 지키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도 보인다. 그 근처에 때로는 밭에서 뜯어온 채소 몇 무더기 놓고 파는 이가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떡볶이 장수가 보일 때도 있다.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자전거도 지나가고, 아침저녁 통학시간에는 길 위쪽에 있는 과천외고 학생들이 떼 지어 지나가고, 휴일이면 등산객이 무더기로 지나간다. 이 길은 과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불그스레한 우레탄으로 포장이 되어있는데 이 포장을 새로 할 때면 그 지독한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것을 코로 들이쉬고 지나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사뭇 걱정되지만 이 때 말고는 쾌적하고 아늑하여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길이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 길 한가운데에 웬 기념비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검정색 대리석 기단 위에 산 모양 비슷한 흰 색 돌조각이 올라앉아 있는 이 기념비가 서게 된 사연과 주민의 반응은 이렇다.

"중앙동 1단지 옆 관악산 등산로 길, 일명 관문로 거리의 숲이 한 운동단체가 주는 아름다운 거리의 숲으로 지정되자, 과천시가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환경을 훼손, 주민들과 등산객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다.

과천시는 지난해 11월11일 관문로 거리의 숲이 산림청, 생명의 숲 국민운동・유한킴벌리로부터 아름다운 거리의 숲으로 선정돼 우수상을 수상하자,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지난 4월에야 숲길의 정 중앙에 가로와 세로 140cm, 높이 173cm로 설치했다.
그러나 과천시가 이 큰 기념비석을 설치하기 위해 가로수 베어낸 것은 물론 길이 좁아지자 길 가에 있던 벤취 2개마저 뽑아버렸다


지연희(중앙동 주민)씨는 상을 받은 일은 좋은 일이나, 굳이 환경을 훼손하면서까지, 그것도 숲길의 정 중앙에 큼지막하게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있었느냐며 그나마도 기념비가 거리의 숲과 조화되지 않는 것은 물론 밤에 길을 가다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부딪혀 부상당하기 십상이어 철거나 이전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필호 시민기자)

2005년 5월 <과천마을신문>에 실린 기사다. 하지만 이 기념비는 지금까지 굳건히 버터고 서있다. 난데없이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니 누구나 기념비님을 비켜서 돌아가야 한다. 기념비라기보다는 장애물에 가깝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주민도 원하지 않고 길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손상하는 이런 기념비가 왜 보란 듯이, 떡하니 서있어야 할까. 이것이 이 시대의 미의식일까. 길 옆 나무 밑, 풀 사이에 기념으로 조촐한 돌을 놓아두었더라면, 거기에 간단한 사연을 새겨 놓았더라면, 오면가면 그 겸손한 돌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정겹게 느낄 것인가. 있는 듯 없는 듯 서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쁠 것인가.

이런 이유로 이 기념비를 지날 때면 심사가 편치 않다. 마치 고개를 넘는 느낌이다. 내가 넘는 첫 번째 고개가 된 사연이다.

분수대와 어린이 놀이터

보행자 길을 벗어나 과천의 중심도로인 4차선 큰 길을 건너면 중앙공원이다.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조각분수대가 있다. 원형의 분수대 가운데에는 위로 삐죽 치솟은 미끈한 돌조각들이 서있고 분수대 주위 바닥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이 분수대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있다.
"상승-화합 이 조각분수는 폭 12m 원형 기단과 높이 7m 상징조각으로 구성되었다. 하늘로 뻗는 상승구도는 과천의 이미지 창출부각을 위하여 관악산 청계산 우면상 등 과천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태를 흰 화강암으로 상징화 하였으며 과천의 주산인 관악산 기운과 국내 일등 시인 과천시가 서로 만나 세계 제일의 시로 상승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형상화 하였다 ... "

분수대 조각은 주변의 산을 상징하여 하늘로 치솟는 기운도 보여주고 일등과천이 세계 속의 일등이 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글쎄... 나는 굳이 일등과천이 아니라 그냥 보통과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등, 이런 단어의 부추김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허망한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렇게 못난 생각을 하면서 조각을 쳐다봐서인지 조각들이 너무 위로 치솟아 중앙공원을 바라보는 시야를 차단한다. 답답하다.

게다가 2미터나 치솟은 화강암 몸통에는 곧잘 초록색 이끼가 끼어 지저분하기가 일쑤다. 이끼를 닦아내느라 약품을 쓰는 건지 청소하고 난 물에는 화학성 거품이 둥둥 떠 있기도 한다.

분수가 물을 뿜지 않을 때는 뎅그런 화강암과 물구멍 파이프만 보이는 것이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다. 반면 물을 뿜을 때는 분수대가 목욕탕처럼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행여 아이들이 물에 이끌려 자칫 한발이라도 딛는다면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름에는 분수대를 빙 둘러 싼 구조물을 설치하고 꽃 장식까지 한다. 아름답기보다는 복잡하게 보인다. 덕지덕지 화장을 하고 또 해서 우스꽝스럽게 된 얼굴과도 같다. 반면 분수대 주위 시멘트 바닥은 얼마나 초라하고 삭막한 느낌을 주는지. 여름 땡볕에서는 눈이 부시는 효과를 극대화 한다.

왜 공원 들머리에 분수가 있어야만 할까. 분수대를 유지하려면 계속 에너지를 써야하고 따라서 세금을 써야 한다. 그래도 꼭 분수가 있어야만 한다면 시야를 가리지 않는, 작고 낮으막한 분수가 있으면 안 될까. 분수 주위는 풀밭이나 녹색공간이어서 잠시라도 머리를 쉴 수 있는 곳이면 안 될까. 그래서 이 분수대가 내가 넘는 두 번째 고개다.

분수대를 마악 지나면 오른쪽으로 어린이 놀이터가 나온다. 끊임없이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고 그 옆에서, 혹은 그 앞 벤치에 앉아서 미소를 띠고 지켜보는 엄마나 아빠 혹은 할머니를 흔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놀이터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있고 바닥은 고무매트가 깔려있다. 몇 해 전까지 모래가 깔려있는 것을 봤는데 어느새 고무매트로 바뀌었다.

그런데 나는 어린아이들이 이 고무매트 위에서 노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고무매트가 보기에 깨끗하고 관리가 용이하지만 화학물질 방출로 어린이 건강에 위험할 수 있고 비교육적이라는 점은 이미 논란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문제제기 되는 형편이다. ("고무매트 놀이터 우리아이가 위험해" 김미현 기자, "모래보다 매트 놀이터? 아이들 취향은 달라" 원동업 기자 <오마이 뉴스>)

어느 놀이터에나 있는 똑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놀이기구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는 것 역시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방부목재 놀이기구의 유해성이 논란이 되면서 플라스틱이 그보다는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플라스틱도 환경호르몬 논란으로부터 제외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플라스틱 놀이기구의 지나치게 인공적인 원색을 보면 아이들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지 공연한 걱정까지 하지 않을 수 없다. 철제 기구에 칠한 페인트에 들어있는 납 성분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예전에 캐나다 오타와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내가 살던 동네의 부모들이 모여서 1년여에 걸쳐 동네 놀이터에 대한 의논을 하는데 놀이터에 들어가는 모든 자재와 놀이기구의 종류, 재질 등을 직접 계획하고 선정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숲에서 베어낸, 혹은 쓰러진 굵은 나무둥치를 끌어다가 조금만 다듬어서 그대로 놓아둔 놀이터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훌륭한 놀이기구가 된다. 유럽의 도시에서 공원을 가면 어린이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이 공원마다 그곳에 맞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공장에서 판박이로 찍어낸 원색의 플라스틱 놀이기구가 어디에나 똑같이 설치된 것을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커졌다고 하는데 왜 어린이들은 해로운 물질 속에서 놀아야 하는지, 상상력이 커갈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공간에서 놀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면서 마음속으로는 세 번째 고개를 넘는다.

야외음악당, 달팽이 언덕, 꽃길

어린이 놀이터 건너편에는 야외음악당이 있다. 시멘트로 지어진 이 야외음악당은 처음 의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제 점점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돔은 먼지가 잔뜩 앉아 초라하고, 방수액을 부은 것 같은 시멘트 무대는 마구잡이 싸구려 시설임을 말해준다. 타일이 깨져나간 시멘트 객석은 꼴불견이다. 비록 타일을 바르기는 했지만 마치 예전 새마을 운동시절 시멘트로 모든 것을 발라버리던 때의 작품처럼 황량하게 보인다. 게다가 객석이 동시에 담이 되어 야외음악당은 닫힌 공간이 되어버렸다. 공연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이 담으로 바깥과 구분을 지었다면 적어도 이보다는 아늑해야 할 텐데 자못 살벌한 느낌이다.

흔히 분수대 광장이라고 말하는 이 담장 주변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행사가 벌어진다. 그러나 광장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아니다. 넓을 수도 있는 공간이 이 담으로 인해 조각이 난 꼴이다. 차라리 담을 헐면 어떨까. 평소 이용 율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계단식 객석이 버티고 담장구실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간소하고도 아름다운 무대와 그에 어울리는 모양의 간단한 돔이 있고, 그 앞은 시멘트 바닥과 담장대신 풀밭(잔디가 아니라 풀밭이다)이면 어떨까. 좋은 음향시설을 갖춘 무대에서 연주나 행사가 있을 때는 풀밭에 앉아서 들을 수도 있고 오가는 사람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아쉬움으로 나의 네 번째 고개는 야외음악당이다.

야외음악당을 지나면 달팽이 언덕이라고 불리는 곳이 나타난다. 동심원을 그리는 나선형의 길이 빙글빙글 세 개나 나있는 것이 달팽이 모양이어서 달팽이 언덕인지, 아니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 올라가라는 뜻에서 달팽이 언덕인지 알 수 없다. 언덕 맨 위는 관악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언덕을 지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는 달팽이 언덕을 곧장 올라가서 가는 방법이다.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가 다시 건너편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계단이 사람의 보폭에 맞지 않게 설계되고 미끄러워서 주의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곳이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달팽이 언덕을 올라가려면 나무로 만들어 놓은 간이계단이 있다... 계단 발 디딛는 곳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경사가 져서 비오는 날엔 흙이 쓸리고 나무가 비에 젖어 미끄러지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본인도 가끔 그 길은 다니면서 미끄러질 뻔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사건은 얼마 전에 일어났다. 장마가 계속되던 얼마전 여름 한 시민이 슬리퍼차림으로 그곳을 지나다가 미끄러지면서 다리의 뼈가 밖으로 노출되었다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시민이 있었다. 과천품앗이 회원 이모씨(별양동)는 그 곁을 지나가다 119구급대에 실려가는 시민을 목격했는데 너무 놀라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 (2006년 8월 14일 <과천마을신문>)

2006년에 이런 보도가 있었지만 사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팽이 언덕을 지나가는 두 번째 방법은 달팽이 아랫길을 따라 빙 돌아서 가는 방법이다. 걷기 좋은 길도 아니고 나무 그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둥글게 휘어지는 좁다란 아스팔트길을 고행하듯 빙 돌아서 가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도 그렇게 길이 나있으니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달팽이 길 아래를 따라 빙 돌아서 가기는 한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나선형 길을 따라 계속 빙빙 세 바퀴씩 돌아서 언덕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가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세 번째 방법은 언덕을 피해서 바깥 길로 빙 돌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자전거는 이 길로 간다. 달팽이 언덕이 주인처럼 공원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사람들은 한쪽 구석에 난 길로 다니는 것이 퍽이나 옹색한 느낌이다.

왜 이 달팽이 언덕이라는 인공 구조물이 공원 가운데를 가로막고 버티고 있을까. 왜 굳이 관악산을 상징하는 언덕이 있어야만 할까. 계단을 올라가서 갈 때나 이 언덕을 피해서 빙 돌아다닐 때나 항상 드는 의문이다. 그래도 언덕이 꼭 있어야 한다면 계단도, 빙 돌아가는 길도 없이, 나무 그늘도 있고 풀도 자라는, 그냥 자연스러운 언덕이면 어떨까. 이런 이유로 이름도 예쁜 달팽이언덕이 나의 다섯 번째 고개다.

달팽이 언덕을 넘으면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시멘트로 덮인 길이 아니라 나무블럭이 박힌 길. 구불한 길. 나무 사이로 난 아름다운 길. 멀리서 봐도 걸어가 보고 싶은 길이다. 중앙공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길이 바로 여기 아닐까. 길옆의 정자도 근사하다. 여기서 나는 지난여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날씨 좋은 날 오전 이 정자에 앉아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딴 세상인 듯 마음도 몸도 한가로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길에도 복병이 숨어있다. 언제부터인가 길 옆 나무 밑에 꽃들이 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강렬한 원색의 빨갛고 노란 꽃들이 나무를 포위라도 하듯 놓여있고, 심지어는 이끼로 된 동물이나 사람 모형을 세워놓아 거기에도 꽃을 매달아 놓았다. 빨갛고 노란 원색으로 장식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이 조화보다도 더 조화같이 보이는 꽃들이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제각각이라 이 꽃들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지나치게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서 거북하기 짝이 없다. 그냥 두면 자연스럽고 아름다울 길에 왜 부자연스러운 꽃을 늘어놓는지 의아한 일이다.

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을 도무지 아름답게 볼 수 없도록, 살아있는 꽃을 흡사 조화라도 되는 양 너무나 인공적으로 꾸며놓은 것을 보면 서글프기까지 한다.

더구나 그 꽃은 땅에 잘 심은 것도 아니고 1회용 포트에 담겨 놓여있다. 꽃이라는 생명까지 1회용으로 여기는 것 같아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해도 이것은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사실 꽃의 출현은 이곳만이 아니다. 분수대 가에도, 어린이 놀이터 둘레에도, 놀이터 앞 나무 사이에도, 달팽이 언덕 위에도, 현충탑 가는 길에도 곳곳에 구조물과 함께 꽃이 매달려 있거나 놓여있는데 아름다워야 할 꽃들이 오히려 공원을 답답하게 만드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 넘치면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꽃에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중앙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길이 그만 나의 여섯 번째 고개가 되어버렸다 길가 화분

'우리동네', 시멘트 블록, 현충탑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는 '우리동네'라는 조형물이 있다. 과천의 모습과 주변의 산이며 하천을 상징하는 이 조형물은 입체지도를 공원 바닥에 재현해 놓은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것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소개하기로 한다.

"중앙공원 한가운데에는 과천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시설물 안내도에는 '본 공원 시설은 우리 동네라는 시설물로서 우리시를 에워싼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을 축소 모형화 하였으며 시가지 중심에 흐르고 있는 양재천과 양재천 인근에 위치한 중앙공원 및 시청과 정부제2청사 등의 위치를 표시한 상징적 모형작품이오니 시민들이 시설물(작품) 내 통행을 지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명과 주의의 말이 스텐 철판 위에 또박또박 써져있다.

그런데 그 조형물이 보행로 한가운데 세워져서 통행자들의 대부분이 그것을 밟고 다닌다. 별양동 5단지에 사는 이모씨(73)는 통행에 불편만 주고, 관리도 안 되는 것을 막대한 돈을 들여 이렇게 해놓은 것이 뭐냐 해놓기만 하면 그만 인가하며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5월 30일 9시 30분에서 10시 30분 1시간동안 현장 조사를 해보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만 헤아려 보았더니 통행자 148명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과 그를 부축해가는 5명만이 길 따라 돌아가고 나머지 143명은 조형물을 밟으며 그 위로 통과했다. 지나가는 몇 사람에게 이 조형물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시민에게 불편을 주고 거슬리는 흉물이나 통행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막대한 예산을 드려서 좋은 의도로 해 놓았는데 오히려 시민들에게 불편만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천역 5번 출구로 나오면 현충탑을 지나 우리 동네라는 시설물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이곳에 등나무와 벤치가 놓여 있었던 곳이다. 공원을 걷다가 쉬어가기도 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정담을 나누던 곳이었다. 이곳이 우리 동네라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고 난 후에는 길이 막혀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불편해서 많은 사람들은 우리 동네한복판을 질러 다니고 있다. 그러니 걷기에 불편하고 눈이 올 때는 미끄러지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물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 훌륭한 시설물이긴 하지만 그것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으니 편리하게 개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넓지 않은 공원에 웬 상징물이 곳곳에 널려있을까. 왜 상징물을 설치해야 할까. 주민들의 의견과 같은 이유로 '우리동네'가 나의 일곱 번째 고개가 되었다.

'우리동네'를 지나면 현충탑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동안 달팽이 언덕이며 '우리동네'가 차지하고 난 한 옆의 좁은 길로 돌아오느라 고생했다는 듯 이곳은 아예 휑하니 대로가 뚫려있다. 나무는 길옆에 시늉만 있고 가운데 넓은 길 전체가 싹 시멘트 블록으로 포장이 되어있다. 시민들 걷기 좋으라고 깔아놓은 것일까. 청소도 쉽고 관리하기 쉬워서일까. 양 옆으로 등나무 벤치와 공중화장실을 지나고 현충탑을 지나서 도서관 앞까지도 시멘트 블록은 계속된다. 차가 다니지 않아서 공원일 뿐 공원 중심부 상당부분이 공원답지 않게 삭막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면 항상 내가 꿈꾸는 공원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공원 전체가 숲과 풀밭으로 이루어진 그런 공원. 한 구석에는 연못도 있는 공원.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있는 공원. 군데군데 자연스러운 꽃밭도 있는 공원. 모래 밭에 큰 통나무 둥치 몇 개 놓인 놀이터가 있는 공원, 과천의 중앙공원이라고 그렇게 만들지 못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중앙공원이 생긴지 20년이 훨씬 넘었다. 그동안 나무들이 자랐으면 지금쯤은 키가 커서 나무터널을 이루고도 남았을 터다.

그래서 이 시멘트 블록이 깔린 대로 부분이 내가 넘는 여덟 번째 고개가 된다.

여기를 지나면 곧바로 거대한 현충탑과 마주치게 된다. 눈앞을 가로막고 우뚝 선 모습이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탑이다. 이 탑의 크기에 비하면 중앙공원은 너무나 협소해 보인다. 적어도 중앙공원의 서너 배는 되는 광활한 곳에 서 있어야 할 것 같다.

통행로에 그 웅장한 원형기단이 넉넉히 자리 잡은 탓에 오른쪽 끝은 거의 공원 경계와 맞닿아서 사람하나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공간이 되었다. 반대편은 그나마 여유가 있어 나처럼 도서관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지하철 이용자. 통학생, 주부, 어르신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주부, 자전거를 탄 사람 등 수많은 시민들이 원형 기단 주위를 빙 돌면서 지나다닌다.

하루는 큰마음 먹고 현충탑 앞에 서서 검정색 화강암에 멋드러지게 휘갈긴 비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첫 부분이 이렇게 시작된다.

"날파리는 하루 예술은 십년 인생은 백년…"
속으로 웃음도 나오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현충탑 비문의 첫머리가 날파리라니. 날파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숙한 비문의 첫머리로는 꽤 희귀한 단어일 것 같다. 현충일에 이 앞에 모여서 기념식을 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식순에 비문 낭독은 없는지 모르겠다.

현충탑 부근에는 앞 뒤 두 군데에 스텐레스 판 안내문을 세워놓았다. 현충탑 부근이니 엄숙히 하라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 앞에서 갑자기 엄숙모드로 바꾸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웃고 뛰노는 아이들은 더 그렇다. 공원이라는 자유스러운 공간과 정숙을 요하는 현충탑이 어울리기 바라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과천 중앙공원을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왜 현충탑이 중앙공원에 꼭 있어야 하나요?"

그렇다. 나도 묻고 싶다. 왜 현충탑이 중앙공원에 있어야 할까. 나의 아홉 번째 고개는 현충탑이 될 수밖에 없다.

집에서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아름다운 숲 거리와 공원을 거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관악산도 바라보고 청계산도 바라보고 길옆의 풀도 보고, 가을에는 곱디곱게 물든 단풍잎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면서 가는 길이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에 보이는 아홉 고개는 아직은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은' 이라고 말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겠다. 앞으로 아홉 고개의 숫자가 줄어들 수 있을까. 과천을 사랑하고 도서관을 사랑하는 한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고개 길을 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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