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부활절 기념 소고 Lukács

언러브드 2008. 5. 19. 14:57
Lukács  (IMIN 68743) :: 부활절 기념 소고 :: 2008/03/24 08:18   

1. 21세기 신성동맹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살벌한 문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재 종교가 세계에 끼치는 피해는 막대하다는 점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종교단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행과 종교행위를 통해 얻는 정신적 만족감이 아무리 많다한들 종교가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의 희생자 수 만큼이나 될까. 마더 테레사는 예수가 아니기에 사티(남편 사망 시 부인을 화형 시켜 순장하는 인도의 인습)의 희생자들을 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폐해가 각종 미디어들을 통해 알려졌음에도,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계몽주의 이후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의 수는 변함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인구의 수는 단연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제 1세계에서부터 제 3세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 기독교 인구는 각국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며 세계문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아니, 이제는 정치적 헤게모니까지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이지만 그 중 세계패권으로 질주를 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의 참상을 잘 알고 있다.

제 2의 신성시대가 오지 않더라도 이미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민사회에 대한 폭력은 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일류 과학자까지 나서서 기독교를 상대로 공중전을 전개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창조론이라는 사이비 과학에 대한 우격다짐식 신봉과 강요, 봉건적 종교윤리에 따른 시민사회의 재편 시도 등 기독교의 폐해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아쉽게도 이것은 ‘기독교 국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로 대통령을 필두로 한 소위 ‘고소영 인맥’ 은 드디어 기독교가 기존의 학연, 지연과 더불어 사회의 메인스트림을 판단하는 범주로 등극하였음을 말해준다. 예전부터 이야기되어 오던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보수 기독교계의 권력욕과 복음주의 교단의 안하무인 식 전도행태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천박한 정신을 지닌 한국의 기독교(한국의 경우는 엄밀히 따지면 개신교이지만)가 사회의 메인스트림이 되는 순간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창조론을 믿는 미국의 악몽이 시작된다. 날것의 파토스가 그대로 분출되는, 마치 부흥회와 같은 정치행사들이 일상을 뒤덮고 말끝마다 신을 외치는 미국의 상황이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공론장에서의 기독교의 세력화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볼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절을 맞아 국가와 세계, 인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끝없이 불어나는 신성가족의 인구수에 대한 산아제한 시도로서 이 졸고를 쓴다.

2.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독교

흔히 기독교 측에서는 종교는 과학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준다는 말로 존재론적 정당화를 시도하곤 한다. 영혼 없는 세상의 영혼이여, 눈물 없는 세상의 눈물이여. 사실 저러한 변명만큼 기독교의 본질을 잘 표현해주는 말도 찾기 힘들다. 종교는 과학과는 분명히 다르다. 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개개인의 ‘체험된’ 세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세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과학과 구분되는 지점은 여기이다. 이데올로기는 객관적 실재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아닌, 인간의 즉각적 경험에 내재하는 실체의 공상적이거나 환상적인 표상이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숭배 대상이 끊임없이 바뀌고 분화되었을 뿐 초자연적 존재를 숭배한다는 본질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위치한다. 결국 종교 역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근본적 무의식에 근거하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체험’ 들이 형성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게다가 이데올로기는 이론적인 것(the theoretical), 지식(knowledge)보다 실천적-사회적인 것(the practico-social)이 우선하기 때문에 사회현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각각의 개인들을 허상의 사회에 응집시키는 접착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체호출. 이데올로기는 각 개인에게 주체가 되어 무언가 존재론적 의의를 가지라고 속삭이지만 그 속삭임은 구조기능주의적 역할분담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헤게모니 구조에서는 모두가 나름의 주체적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결국은 사회가 그 사람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체의 비유와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의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아닌, 주입된 이데올로기의 규범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착각하는 ‘상상된 주체’ 에 불과하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등의 레토릭은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체호출이다. 동형 논리로 따지면 히틀러 유겐트도 개개인은 주체적이었을 게다. 총통 안에서의 독일 민족의 자유.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각자에게 존재감과 세계상을 부여하여 헤게모니에 종속시키는 것이기에 종교 역시 사회적 헤게모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마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 권력이 어떻게 사회를 구조화 시켰는지 상기해보자. 한국에서의 대형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도화된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체제의 한 부분이며 창시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회통합’ 을 위해 기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버려야 할 대상에 불과한가. 바로 결론으로 도약하기에는 아직 난제가 남아있다. 종교에 가장 적대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완벽한 사회주의 체제가 도래하더라도 이데올로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미시적으로는 인간 본성의 일부, 거시적으로는 사회구성체(social-formation)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기독교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 자체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질문은 간단하다. 과연 기독교는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자신의 삶을 바칠 가치가 있는 대상일까.

3. 기독교 교리의 정당성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존재는 단연 신이다.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독교인은 자신의 자연에 대한 무지를 신이라는 존재로 치환시킨 어느 고대인의 아포리아에 갇혀 허우적대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아마 그 고대인은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먹으며 대형교회에서 현란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현대의 예배를 감상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신은 분류상 인격신에 속한다. 사실 야훼든 알라든 비슈누든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실증적 증거가 없는 이상 스파게티 괴물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가설보다 약간 높은 진리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그나마 기성 종교의 진리치가 높은 이유는 텍스트의 저자들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스파게티 괴물신 가설에 비해 조작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만약 모든 계시종교의 텍스트를 진리로 간주한다면 천지는 몇 백 명의 신들의 분업체제에 의해 창조되었을 게다.

현재까지 인격신 가설을 증명하려는 고전적 시도-안셀무스와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는 칸트에 의해 좌초되었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신 자신도 그리고 그가 동반하는 성질도 직관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의 이념은 공허한 이상이다. 신의 존재는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철학의 ‘부조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라는 명제는 현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람들이 인격신을 믿는 것은 신의 존재 자체보다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신의 모습이 모두 다른 것은 여기서 기인하리라.

그렇다면 잠시 신의 존재 여부는 차치하고 교리 자체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검토해보자. 기독교를 비롯한 계시종교는 철저히 인격신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신의 성격에 따라 그 정당성 여부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신을 믿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겠지만 표면적 이유는 신의 ‘윤리적 가르침’ 을 따르는 것이다. 신은 과연 그 자신이 윤리의 기준이 될 수 있거나 혹은 항상 윤리적으로 행동하는가.  

최소한 기독교의 신은 이와 거리가 먼 것 같다. 예수를 희생시킴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원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야훼에게도 희생양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범우주적인 죄와 벌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혹은 야훼의 분신인 예수를 희생시켜 죄의 울타리를 허물었다면, 즉 윤리와 도덕의 기준 자체를 파괴하였다면 딱히 교리를 지키며 ‘윤리적으로’ 살 필요가 없게 된다. 부활과 함께 기준을 새로 만들었다 해도 일단 개보수(?)를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점에서 첫 번째 논리로 돌아간다. 이래저래 신은 전지전능과도 거리가 멀고 윤리성마저 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 항상 윤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설보다는 결과가 양호한 편이다. 구약성서에 표현된,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민족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신(못 믿겠거든 ‘여호수아‘ 10장 40절을 참고하시라)을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간주한다면 인류역사상 가장 윤리적인 인물은 칠장이 히틀러 혹은 그루지야의 인간백정 스탈린이다. 유대민족 제일주의자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제노사이드를 명령하는 신이 윤리적이라면 그것은 너무 심한 블랙코미디이다. 차라리 아이히만이 야훼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소 냉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모든 도덕과 윤리는 하부구조-즉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 제노사이드를 명령하는 신이 윤리적 기준이 될 수 없다면, 윤리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헤게모니 구조이기 마련이다. 기득권층이 그토록 사회의 도덕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변단체들을 동원하여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는 도덕과 윤리가 자신들이 가장 큰 경제적 잉여를 누릴 수 있는 체제를 유지시키는 규범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시대의 기득권층은 가톨릭 성직자 계층이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윤리 또한 하부구조의 영향을 받아 변해온 이데올로기이며(물론 종교 윤리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바뀌지 않는 의무론적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은 계몽주의 이전의 윤리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지배윤리는 바로 시민윤리이다.

윤리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은 많겠지만 윤리와 도덕의 정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활동준거 및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규범 정도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설사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해도 윤리성을 날로 먹을 논리적 이유는 전혀 없다. 개개인과 소통이 불가능한 이데아로서의 신이 아닌, 인간과 대화를 하는, 타자로서 존재하는 인격신이라면 그 역시 윤리와 도덕을 구성하는 한 축에 불과할 뿐이다. 최소한 시민윤리에서는 모든 객체들이 윤리와 도덕에서 가지는 표는 동일하다. 현대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사실 고전적 계시종교는 언제나 자체적인 도덕 및 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민윤리와 어느 정도 경쟁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열혈 개신교인들이 시민윤리를 무시하는 모습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계시종교의 윤리적 당위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 이들은 두 가지 분류 중 한 가지에 속하게 된다. 허상을 섬기는 망상증 환자 혹은 신(이 경우에는 어떠한 신성함도 없는, 힘만 센 존재이다)에게 붙어 인류를 팔아먹는 천박한 아부꾼. 심하다고 생각하면 우선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윤리성을 입증하라. 아니면 사복음서를 제외한 모든 성서-바울의 여성혐오증도 상기하자-를 불태우든가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개별 종교 내에서의 논리적 정당성 여부를 넘어 비교종교학과 신화학의 실증적 연구 성과가 개입하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성서가 신이 내려준 진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텍스트에서 신의 존재 및 정당성을 도출해 낼 수 있겠는가. 시대에 따라 바뀌어온 신관(神觀)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성서의 텍스트들은 스파게티 괴물신이 그러져 있는 구글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가설도 가능할 것이다. 각 종교의 텍스트는 단일한 신을 불완전한 인간의 눈으로 표현한 서로 다른 파편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UN 주최로 니케아 공의회를 다시 열어야 할 것이다. 세계종교를 만들던지, 기독교에서 독점적 구원 교리를 삭제하던지.

4. 기독교 밖의 세계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 모든 허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현재 이 시점에도 번성하고 있다. 이는 분명 과학과는 다른 영역인 이데올로기 영역에 위치하기에, 과학이 채워주지 못하는 존재론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만큼 편한 이데올로기도 없다. 치열한 고민과 반성, 이성적 혼란이 없이 ‘믿으면’ 되기 때문이다. 타 이데올로기에는 능력의 문제가 개입하지만 종교는 자기세뇌의 노력 정도에 따라 신앙이 결정된다는 면에서 매우 평등하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부족하더라도(혹은 머리가 나쁠수록) 노력만 하면 신앙이라는 실존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듯 종교 역시 과학과 쌍두마차를 이룰 이데올로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과학적 실증주의의 잣대로 종교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대부분의 경우 ‘과학 역시 하나의 종교’ 라는 범주혼동의 오류를 반론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이지만 굳이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거부해야 할 명분은 많다. 현실 사회주의가 아무리 많은 희생자를 내고 경제적으로 파탄이 났다 하더라도 개신교의 교리보다는 상식적이다. 광적인 반공주의가 아무리 무식하고 편협하다 할지라도 종교전쟁에 비하면 참상은 비교적 덜하다. ‘빨갱이’ 는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악마’ 는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가끔 빨갱이라는 현실적 존재와 악마라는 영적 존재를 등치시키는 발달장애 환자들도 있지만).

온전한 주체로서 세계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대체 품목은 생각보다 많다. 시민운동에 투신할 수도 있으며 혹은 NGO 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당연히 기독교를 믿는 것에 비해 힘겨운 길이 되겠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천상의 신보다는 지상의 인간 사이에서 찾는 것이 아무래도 더 실감나지 않겠는가. 윤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는 의견을 수용한다면 이편이 더 윤리적이기도 하다. 승천하기에는 지상에서 할 일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은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야지 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가 일부러 뇌내망상의 구현체 혹은 폭군의 입장에서 사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신이라면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신의 윤리적 정당성은 별로 설득력이 없기에, 종교윤리와 시민윤리를 비교하여 더 공적 효용이 큰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자세이다.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들의 종교 윤리는 중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 윤리의 역사성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한다(여호와의 증인이 대표적 예이다). 어차피 신은 당신의 자녀를 알아보시니 돼지고기를 먹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내시지는 않을 것이다. 저런 이유로 지옥에 보내는 신이라면 차라리 신에게 반항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지상의 비참을 보라. 부시가 성서 앞에서 선서를 하는 순간에도, 개신교 장로가 서울시를 야훼에게 봉헌하는 순간에도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굳이 세계체제론 등의 거창한 이론을 빌려 이 비참이 누구의 탓인지 밝혀내지 않더라도 현실을 이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다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어느 종교에서도 이웃이 배를 곯고 있는데 혼자 종교의식에 몰두하여 구원받으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전이 벌어지는, 혹은 자아가 무한한 확장을 거듭하는 관념적 세계 밖에서 비로소 세계는 시작되고 세계를 바꿀 힘이 생겨난다. 이것이 기독교 밖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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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긴 했지만 부활절을 맞이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올립니다.
옛날에 써뒀던 글에서 아이디어를 따와서 기독교에 한정지어서 보강했습니다.
현충일에는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을 보고 부활절에는 이런 글을 쓰니
언젠가는 벼락을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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