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지금은 죽을 수 없는’ 재벌 오너의 운명
포스트 이건희 시대, 삼성의 지배구조는 어떻게 바뀔까
“죽으면 죽었지, 지금은 못 죽는다.”
1990년대 한 대학교 화장실에 누군가가 휘갈겨놓은 낙서의 한 대목이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며 무엇이 그리 억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낙서의 주인공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장은 결코 죽을 수 없노라’는 절박한 심정을 이 한 문장에 담아놓았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병세가 오리무중이다. 벌써 숨졌다는 사망설도 한바탕 나돌았고, 사실상 식물인간이 돼 숨만 쉬고 있다는 중병설도 퍼졌다. 이런 ‘소문’을 막기 위해 최근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휠체어에 앉을 정도로 병세가 호전됐다”고 발표했다. 퇴원을 대비해 이 회장의 자택에 엘리베이터 공사를 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휠체어에 앉은 이 회장’의 사진 한 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수 십 조 원의 재산을 가진 재벌 총수건, 하루 벌어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건, 모든 생명은 소중한 법이다. 그리고 어떤 존재이건 죽음을 앞둔 인간은 존엄하고 귀하게 여겨질 자격이 있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논외로 하면, 한국의 최대 재벌 그룹을 이끌었던 이 회장의 병세가 한국 사회에 가져다 줄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이 회장이 단지 한 때 한국 경제계를 호령했던 거목(巨木)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병세와 생사에 순환출자 구조로 일가(一家)의 그룹 지배권을 확보해 온 삼성그룹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죽으면 죽었지, 지금은 결코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